□ NO. 52.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기록으로 보는 이미자(2022.02.28)
오늘 독자논단 52회차는 작년 3월 1일 연재를 시작한 “고인돌의 트로트, 세월따라 사연따라” 1주년을 맞이하여
대중예술평론가 박성서님이 기획해 2015년 9월 18일부터 2016년 2월 28일까지 164일간 춘천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개최한「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기록으로 보는 ‘李美子 특별전’」이 폐막된지 벌써 6년째 되는 날입니다.
필자와 ‘엘레지여왕 이미자 팬클럽’ 카페지기 동백꽃(가수 나미주), 뜨란체, 순억지님 등 회원 10명은 개막식에 초청받아 참석하여 이미자 선생님의 특별전을 축하해 드렸던 좋았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박성서님이 작년 2월 27일부터 2월 28일까지 ‘박성서TV’에 올리신 것을 실어봅니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선생님의 생생한 육성으로 들어보는 가요 인생 62년과 자막으로 보는 이미자 선생님의 가요 인생, 그리고 주옥같은 노래들을 들으시면서 새봄 맞이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01. [다큐] 기록으로 보는 이미자 특별전 제1부[1] INTRO(노래박물관, 2015년)
「‘2015 노래박물관 李美子 특별전’ 다큐멘터리, ‘이미자 노래 한가닥’은 한국인을 하나로 묶는 소중한 ‘끈’ 우리 대중음악사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 격인 이름, ‘李美子’ 그의 활동기록은 이제 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의 기록 그 자체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과 노래를 취입한 가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될 당시인 1990년까지 발표한 음반은 총 560장, 곡수는 2,069곡이었다. ‘엘레지의 여왕’ 李美子씨는 그 많은 노래를 ‘악보 그대로’ 부르는 ‘원곡주의자’ 이기도 하다. 기쁠 때 부르면 기쁜 노래가 되고 슬플 때 부르면 슬픈 노래가 되는 ‘李美子 가락’ 특히 어려울 때 일수록 절절하게 들렸던 이 노래들은 우리네 ‘삶의 동반자’ 이자 ‘지쳐있는 삶의 응원가’였다.
이미자 선생님 인터뷰 말씀, “이 아름다운 남이섬에서 저의 특별전을 마련할 수 있어서 마음적으로 많이 행복하고요. 또 애써서 이렇게 만들어 준 박선생님께 우선 감사드리고요. 제가 가요계 나온 지 56년이 접어들었고 그 다음에 인제 57년째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도 노래도 끝자락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침 모든 것을 다 보여드릴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마련이 돼서 참 기쁘고 마음적으로 조금 흥분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가요 인생을 저는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저의 가요 인생에 좋았던 일, 나빴던 일, 에피소드 이런 것들을 다 솔직하게 다 저를 사랑해주신 팬 여러분들한테 보여 드리고픈 그런 마음도 있었습니다만은 이 기회에 한 분이라도 더 저를 더 ‘아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인생을 살아왔구나’ 하는 거를 보여 드릴 수 있어서 너무 가슴 뿌듯하고 행복합니다. 우선 저를 이때까지 이렇게 사랑해 주신 팬 여러분들게 다소나마래도 보답이 된다면 더 행복하겠습니다.”
2015 노래박물관 李美子 특별전 다큐멘터리, 이미자의 삶과 음악을 말하다. 제1부 구성 및 진행 :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주관 : 재단법인 노래의 노래박물관,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강원도 춘천시, 강원문화재단. 촬영 : 홍석원, 연출 : 박동덕/이영하, 기획 : 박성서, 제작 : ㈜ 미디어 예니, 이 특집 다큐멘터리는 ‘2015 노래박물관 李美子 특별전’ 전시용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촬영에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재단법인 노래의 섬」
–〈동백 아가씨〉–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선생님(1964 미도파·지구레코드사)
1절.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내 가슴 도려 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오
2절. 동백꽃 잎에 새겨진 사연 /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 / 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 외로운 동백꽃 찾아 오려나
–〈사랑했는데〉– 손석우 작사·작곡, 이미자 선생님(1968년 지구레코드사)
1절. 사랑했는데 서로가 좋아서 아아 아아아 아아 아아아 사랑했는데 / 어이 혼자 울어야
하나 아아 아아아 아아 아아아 여자의 눈물 / 그 팔에 안기여 꿈꾸던 창가에 시들은 장미꽃
이 마음 따라 우네 / 사랑했는데 서로가 좋아서 아아 아아아 아아 아아아 사랑했는데
2절. 그 팔에 안기여 꿈꾸던 창가에 시들은 장미꽃 이 마음 따라 우네 /
사랑했는데 서로가 좋아서 아아 아아아 아아 아아아 사랑했는데
지금까지도 그의 노래는 국민들과 늘 함께 한다. 2002년 남북한에 동시 생중계된 ‘평양 동백 아가씨’ 공연에 이어 2013년 파독50주년 MBC특별기획 ‘구텐탁(Guten Tag, 안녕하세요) 동백아가씨’, 그리고 지난해 ‘이미자 노래 50년’ 무대까지 이미자씨는 한국인이 자부심을 느낄만한 많은 무대에서 감동과 기쁨을 나누었다. ‘가늘면서도 비단결같이 고운…’, ‘한 세기에 나올까말까 한 미성’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한풀이이며 마음의 정화요, 깊은 교감…’ 이라는 평가를 받는 가수 이미자,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 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고수, 자존심을 지켜오고 있는 인물. 때문에 해외동포들에게 그의 노래는 ‘고향’과 ‘어머니’, ‘조국’ 이라는 단어를 대신하는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기록으로 보는 李美子 특별전’을 통해 그의 삶과 음악을 재조명, 재평가하는 작업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의 또 다른 전기를 이룰, 의미 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아씨〉– 임희재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선생님(1970년 지구레코드사)
1절.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탄 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 /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어있던 길 /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엔 노을이 섧구나
2절. 옛날에 이 길은 새색시 적에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 / 어디선가 저 만치서
뻐꾹새 구슬피 울어대던 길 /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엔 노을이 섧구나
02. [다큐] 이미자 특별전 제1부[2] ‘열아홉 순정’으로 이름 알리다(노래박물관, 2015년)
「한국전쟁 등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던 유년시절부터 ‘노래 잘하는 소녀’로 불렸던 그. 불과 네, 다섯 살 때부터 부친이 친구들과 젓가락 장단에 맞춰 부르는 ‘유행가’를 신기하게도 가사 하나, 음정 하나 틀리지 않고 따라 불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미자 선생님 말씀, “저는 네 다섯 살 때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다 열악하게 살았었고, 그 우리 아버지의 그 친구 분들이 집에 오셔서 술 한 잔 하실 수 있는 그런… 더 어디 지금처럼 카페가 있어서 그런데 가는 것도 아니고 집에 오셔서 막걸리 한 잔 따라놓고 젓가락 두들기면서 그래서 그 당시 유행하는 유행가들을 부르곤 하셨어요. 어 그런데 어 다음날 제가 그 그 어른들이 부르는 유행가를 제가 가사 하나 잊어 버리지 않고 그대로 그렇게 잘 불러더래요. 그래서 그것이 이제 너무 특이하니까 아버지도 그렇고 어른들이 그거를 자꾸 한 번 해봐라, 해봐라 왜 우리 그 어린애들이 노래, 그 꼬마들에게 노래 시키고 그러잖아요. 그렇듯이 제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동요나 이런 자기 나이에 맞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 어른들의 정말 그 어려운 노래를 구성지게 잘 불렀기 때문에 그때 소질이 있었다는 걸 어른들이 알았던 것 같아요.”
그야말로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다고 할 정도로 타고난 이 신동은 1958년 HLKZ(TBC의 전신) 신인선발 프로그램인 ‘예능 로터리’에 출전 나애심의〈밤의 탱고〉를 불러서 입상한다. 문성여고 3학년 때었다. 이미자 선생님 “어, 예능로타리는 그때는 학교 때문이다. 그까는 어, 노래자랑, KBS의 노래자랑도 학교 교복을 입고 갔다가 어, 그 예선에서 학생은 안된다 그래서 나중에는 평복 입고가서 참가를 했구요. 그렇게 쿵쿨대회고 그 다 다녔다가 마침 그 텔레비전 그 유일하게 그 당시에 HLKZ인가 유일한 텔레비 흑백텔레비젼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예능로타리’라는 그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고 거기에 참가를 했죠. ‘예능로터리’가 때문에 어, 가요부문, 국악부문, 또 무용, 클래식 다양하게 있었습니다. 가요부문에서 제가 대상을 받았죠.”
심사위원들이 놀랐을 만큼 장안에 화제를 몰고 온 그의 노래가 전파를 탄 뒤 이를 계기로 마이크 앞에서 처음 녹음하게 된 노래가 김성근 작곡의〈도라지 부르스〉등 네 곡이다. 이 노래는 이후 유니버샬레코드사를 통해 음반으로 발표된다. 본격적인 가수 활동은 ‘예능로터리’ 출연 두 달 후 작곡가 나화랑 씨에게 픽업 킹스타레코드사에 전속되며〈열아홉 순정〉을 발표하면서 부터다. 두 콤비의 노래는 계속해서〈워싱턴 블루스〉〈집시의 여정〉등으로 이어졌다. 1963년에는 아세아레코드사에 전속되며 영화주제가〈미녀와 도적〉, 손목인 작곡의 영화주제가〈행복한 고독〉과〈백년한〉그리고 1962년 당시 실종된 어린이 ‘두형이’를 찾가 위해 기획한 음반〈두형이를 돌려줘요〉신세기레코드사를 통해 영화 ‘식모(食母)’의 주제가인〈햇빛 없는 그림자〉〈낙엽 지는 비탈길〉등을 발표한 이후 미도파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하고 1964년 7월 영화주제가〈동백아가씨〉를 발표하여 일약 대중음악계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열아홉 순정〉– 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 이미자 선생님(1959년 유니버샬레코드사)
1절. 보기만 하여도 울렁 생각만 하여도 울렁 / 수줍은 열아홉살 움트는 첫사랑을 몰라주세요 / 세상에 그 누구도 다 모르게 내 가슴 속에만 숨어있는 / 으으으음 내 가슴에
으으으음 숨어있는 / 장미꽃보다 더 붉은 열아홉 순정이래요
2절. 바람이 스쳐도 울렁 버들이 피어도 울렁 / 수줍은 열아홉살 움트는 첫사랑을 몰라주세요 / 그대의 속삭임을 내 가슴에 가만히 남몰래 담아보는 / 으으으음 내 가슴에
으으으음 담아보는 / 진주빛 보다 더 고운 열아홉 순정이래요
3절. 저달이 밝아도 울렁 저별이 숨어도 울렁 / 수줍은 열아홉살 움트는 첫사랑을 몰라주세요
/ 상냥한 그대 음성 들려오면 내 가슴 남몰래 설레이는 / 으으으음 내 가슴에
으으으음 설레이는 / 산호빛 보다 더 맑은 열아홉 순정이래요
–〈워싱턴 블루스〉– 손로원 작사, 나화랑 작곡, 이미자 선생님(1959년 킹스타레코드사)
1절. 라일락 꽃이 피면 오신다던 나의 그대 / 내 품으로 아니 오고 알링턴에 외로이 / 잠드신
그대 잊지 못하여 나만 홀로 울어야 하나/ 캐피탈 빌딩위에 보슬비가 내리는/ 워싱턴 부르스여
2절. 월남땅 전선으로 떠나가신 나의 그대 / 로맨스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쓸쓸히 / 그대 이름만 남아 있는 십자가 앞에 울어야 하나 / 유니온 정거장에 울며헤진 그날 밤 / 워싱턴 부르스여
☞ 2절 첫 소절 ‘월남땅 전선으로’는 1959년 당초 ‘코리아 전선으로’를 1972년 개사했습니다.
03. [다큐] 이미자 특별전 제1부[3] ‘동백아가씨’로 트로트 시대를 완성하다(노래박물관, 2015년)
「64년 ‘동백아가씨’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트로트 시대를 ‘완성’ 시켰다고 평가받는 이미자씨, 해적판까지 기승을 부리게 만든 ‘동백아가씨’ 신드롬 우리 가요계에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미8군 출신가수들이 주축을 이루던 1960년대 다양한 장르와 번안곡이 유행하던 이 무렵 〈동백아가씨〉의 빅히트는 우리나라 대중가요를 다시 트로트 위주의 전통가요로 급선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작곡가 백영호씨와 손잡고 발표한 영화주제가 〈동백아가씨〉는 〈황포돛대〉로 이어지며 〈동백아가씨〉의 작곡가 백영호와 지구레코드 임정수 사장과 함께 ‘이미자 시대’는 본격적으로 막을 연다. 게다가 천재 작곡가 박춘석씨가 자신의 곡을 이미자씨에게 취입시키기 위해 자청해서 지구에 전속된다. 작풍도 ‘이미자 풍(風)’에 맞춰 트로트로 선회, 스스로 ‘제2의 전환기’를 맞는다. 이렇게 해서 60년대 빅 히트 3대요소인 ‘지구+박춘석+이미자’라는 진용을 갖추고 〈섬마을 선생님〉, 〈그리움은 가슴마다〉,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 〈황혼의 블루스〉, 〈한번 준 마음인데〉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동시에 백영호 작곡의 〈여자의 일생〉, 〈아씨〉, 〈서울이여 안녕〉, 〈빙점〉 그리고 손석우 곡인 〈사랑했는데〉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거침없는 질주를 계속했다.
작곡가라면 누구라도 탐낼 수 밖에 없었던 ‘달러박스’였다. 특히 저음에서 고음까지 완벽히 소화해내기 때문에 작곡가의 입장에서는 어떤 곡이든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가수였다. 지구레코드사의 전속 작곡가인 박시춘 선생을 비롯해 김인배, 고봉산, 이재현, 홍현걸 선생 등과 손잡고 많은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동시에 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무궁화상을 비롯한 방송국 10대가수상 등 주요 상들을 모조리 휩쓸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이미자 시대’였던 것이다.」
–〈섬마을 선생님〉– 이경재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선생님(1966년 지구레코드사)
1절.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 철새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 열아홉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2절. 구름도 쫓겨가는 섬마을에 / 무엇하러 왔는가 총각 선생님 /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 / 시름을 달래보는 총각 선생님 /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
04. [다큐] 이미자 특별전 제1부[4] ‘동백아가씨’ 일본 가다(노래박물관, 2015년)
「국내에서의〈동백아가씨〉신드롬은 현해탄을 넘어 일본으로까지 이어졌다. 1966년 7월에는 일본 빅터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은 후 일본으로 건너간 이미자씨는 〈동백아가씨(戀の赤い燈, 애수의 등불)〉과 〈황포돛대(別れの悲歌, 이별의 비가)〉를 일본말로 취입한다. 동시에 일본 전역 순회공연을 통해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외신을 타고 날아드는 이 소식에 국민적 자부심은 컸다. 그러나 음반에 李美子라는 이름을 ‘Lee Mi ja’로 영문 표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측 언론들은 일방적으로 ‘리요시꼬’라고 그를 지칭 보도했다. 때문에 당시 외교부와 마찰도 있었지만 이미자씨의 솔직한 해명으로 일단락된다. 아울러 3개월만의 귀국은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귀국기념음반은 물론 기념 공연까지 성황을 이루었다. 〈동백아가씨〉외에도 일본 VICTOR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음반들 이후에도 그는 일본에서 발표하는 음반에는 반드시 ‘Lee Mi ja’라는 이름을 표기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일제감점기 때 나라 잃은 슬픔을 절절하게 표현한 박시춘 작곡의〈눈물의 해협(淚の海峽)〉손석우 작곡의〈노오란 셔쓰의 사나이(黃色いシヤツ)〉손목인 작곡의〈카스바의 여인(力スバの女)〉등을 발표하며 우리나라 작곡가들의 노래를 일본에 소개, 한류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일본어 판〈동백아가씨〉음반의 해적판이 기승을 부렸다는 보도도 눈에 띄게 나왔다. 이미자씨는 현재까지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곡 세계적인 것’임을 노래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황포돛대〉– 이용일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선생님(1964년 미도파레코드사)
1절. 마즈막 석양 빛을 기폭에 걸고 / 흘러가는 저 배는 어디로 가느냐 / 해풍아 비바람아
불지를 마라 / 파도소리 구슬프면 이 마음도 구슬퍼 / 아아아아 어디로 가는 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 황포돛대야
2절. 순풍에 돛을 달고 황혼 바람에 / 떠나가는 저 사공 고향은 어디냐 / 사공아 말해다오
떠나는 뱃길 / 갈매기야 울지마라 이 마음이 서럽다 / 아아아아 어디로 가는배냐
어디로 가는 배냐 / 황포돛대야
05. [다큐] 이미자 특별전 제1부[5] 월남 간 군통령의 원조, 사병들 울음바다(노래박물관, 2015년)
「당시 군대에서도 최고 인기가수였던 이미자 씨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군통령의 원조’다. 특히 군 위문공연의 최고 인기곡이었던〈동백아가씨〉는 누구에게나 두고 온 ‘고향’과 ‘어머니’를 떠 올리게 한다.
1965년 최초로 월남에 파병된 비둘기부대가 ‘부대가(歌)’처럼 불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가는 곳마다 병사들의 눈물로 합창을 이뤘다. 최전방 부대 등 국내 위문공연 때도 마찬가지였다. 입에 달라붙어 늘 흥얼거리게 만들던 어머니의 노래를 듣고 자란 사병들에게는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달래줄 좋은 선물이었다. 그 뿐인가, 예나 지금이나 그의 노래는 ‘고향’과 ‘어머니’, 그리고 해외동포들에게도 ‘조국’이라는 단어를 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기러기 아빠〉– 김중희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선생님(1969년 지구레코드사)
1절. 산에는 진달래 들엔 개나리 / 산새도 슬피우는 노을진 산골에 / 엄마 구름 애기 구름
정답게 가는데 / 아빠는 어디갔나 어디서 살고있나 / 아아아 아아아 아아
우리는 외로운 형제 / 길잃은 기러기
2절. 하늘엔 조각달 강엔 찬바람 / 재 넘어 기적소리 한가로운 밤중에 / 마을마다 창문마다
등불은 밝은데 / 엄마는 어디갔나 어디서 살고있나 / 아아아 아아아 아아
우리는 외로운 형제 / 길잃은 기러기
06. [다큐] 이미자 특별전 제1부[6] 데뷔 10년, ‘엘레지의 여왕’ 1천곡 기념 리사이틀(노래박물관, 2015년)
「이름 앞에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 ‘엘레지의 여왕’은 1967년. 박춘석의 곡 ‘엘레지의 여왕’을 발표하면서 부터다. 당시 납세실적 1위 가수답게 일거수일투족이 세간의 관심사였다. TBC 동양라디오가 67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뮤지컬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했고 11월에는 남정임 주연의 영화 ‘엘레지의 여왕’이 개봉되었다. ‘이미자 고백 수기(告白手記)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실제내용은 이미자 씨와는 관련이 없었다. 단지 픽션일 뿐이었다. 하지만 뮤지컬 방송에 등장했던 2백여 곡만큼은 실제 이미자 씨가 취입한 곡들이었다. 이미자 씨는 데뷔 10년 만인 1969년, ‘1천곡 돌파 기념 리사이틀’을 가진데 이어 취입 1천곡 돌파, 기념음반 ‘재일교포’를 발표한다.
이 무렵 ’전통가요‘ 스타일의 노래를 ’이미자 류‘, ’이미자 풍‘이라 칭했고 노래 잘하는 사람에겐 의례 ’이미자 뺨친다.‘라는 용어가 일상화되어 회자됐다. 불과 데뷔 10년만에 전통가요의 대명사로 자리한 셈이다.
한때 엉뚱한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쉴 새 없는 공연과 취입으로 그의 목은 늘 잠겨 있었다. 따로 연습할 시간조차 없어 녹음이 곧 연습이었다. 그럼에도 ’타고난 목소리‘에 대한 찬사는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성대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의 한 연구기관이 그녀의 성대를 사들였다는 소문까지 전국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물론 낭설이었지만 이미자씨 역시 이 소문을 접했을 때 그리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현재까지도 전통가요의 자부심을 지키고 있는 이미자 씨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노래 잘하는 사람의 대명사이자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상징이다. 불과 데뷔 10년만의 일이었다.」
–〈엘레지의 여왕〉– 이운석 작사, 박춘석 작곡(1967년 지구레코드사)
1절. 바람에 구름 가 듯 흐르는 세월에 / 수많은 괴로움도 참고 견디어 / 가냘픈
어린 가슴 속에 보고픈 어머니가 / 그리워지면 혼자 울다 지쳐서 꿈길로 떠납니다.
2절. 꽃 피면 봄이 오고 초원은 푸른데 / 걸어온 자국 마다 한숨 어리어 / 유전의 애수
젖어들면 입술을 깨물면서 / 희망에 살고 외로움을 달래며 굳세게 살렵니다
-〈재일교포〉- 이경재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선생님(1970년 1000번째 곡)
1절. 강변엔 금모래 옛 동산엔 아지랑이 / 고향 떠난 반 백 년에 청춘은 간 곳 없고
구름 따라 떠도는 나그네 마음 / 아아아 아아아 목 놓아 불러보는 어머님 나라
2절. 뒷동산 감나무 그대로 있을까 / 고향 떠난 반 백 년에 인정은 간 곳 없고
슬피 울며 돌아서는 나그네 마음 / 아아아 아아아 사무쳐 불러보는 어머님 나라
07. [다큐] 이미자 특별전 제1부[7] 금지곡 수난의 명과 암,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vs비탄조’(2015년)
「이미자 씨만의 맑고 독특한 음색은 한국인의 정서를 누구보다 잘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목소리 자체에 이미 여러 가지 감정을 담아서 표현하는 ‘이미자만의 스타일’은 그동안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한 온전한 ‘자기만의 스타일’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며 사랑받을 수 있었다. 우리 대중가요는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국민과 함께 해왔으나 대중가요의 운명은 순타치 못했다. 1950년대 보릿고개 시절 ‘유행가’ 시대를 거쳐 1960년대엔 정치인들에 의해 희생양이 되기도 했고 반대로 홍보의 최전방에서 첨병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중가요의 영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또 정책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시기가 바로 ‘60년대’다. 1960년대는 5·16 이후 ‘월북’, ‘왜색’, ‘저속’, ‘불건전’ 등의 이유로 많은 곡을 금지시켰고 남은 노래도 ‘퇴폐’를 이유로 모두 2절까지만 방송케 했다. 그러나〈동백아가씨〉등이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된 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가수 이미자를 청와대 영빈관으로 불러 육성으로 감상했던 것 또한 유명한 일화다. 이미자 선생님은 1999년 일본 ETV과의 인터뷰에서 “자식같은 그걸 자식이라고 그럴까 뭐라고 그럴까 저의 정말 일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왜색이 어느 게 왜색인지 그 자체를 저는 몰랐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동백아가씨’라는 노래는 당연히 한국식이라고 아주 특별히 더욱이 한국식인 노래라고 저는 제 나름대로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반대하는 사람은 왜색이라는 말을 하니까 저로서는 너무나 어이가 없죠.”라고 1965년 청와대 영빈관 박대통령과 일본 후쿠다 수상이 나란히 앉아서 이미자 선생님의〈동백아가씨〉를 듣고 있다. “제가 화가 났던 그때의 기분은 이 분은 이렇게 좋아하는 노래이고 한데 무억 때문에 나라의 대통령도 좋아하는 노래를 왜색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금지 하느냐 하는 그런 분개죠. 시대의 희생물이라고 하는 것도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시대의 희생물이 아니라 그 시대를 대변해주는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지 그 시대 상황을 너무나 적절하게 대변을 했기 때문에 온 국민들이 그 노래를 좋아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자 씨는 3대 히트곡인〈동백아가씨〉〈섬마을 선생님〉에 이어〈기러기 아빠〉까지 각각 왜색, 비탄조 등의 사유로 금지되면서 한때 가수 생명까지 위협받는 수난을 겪는다. 이 노래들의 금지 배경에는 아직도 확실히 규명되지 않은 몇가지 설이 나돈다. 그 중 하나는 정치적인 희생양 설, 당시 한일국교를 맺을 즈음 치닫던 반일감정을 ‘왜색 근절’이라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민심달래기용’으로 이용했다는 설과 당시 정책구호였던 ‘재건’에 대한 ‘의욕 저하설’등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다른 하나는 주위 음반사의 작용설 정작 당사자인 이미자씨는 후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이미자 선생님 말씀, “제일 죽을 만큼 힘들었던 것은 방송에서 제 노래가 다 뭐 동백아가씨는 33주 동안 1등을 했지만 그러고 난 다음에 그 방송 차트에서 제가 노래가 그러니까 차트 안에 잘 못 들어요. 제가 어떤 노래던 많이 유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지곡이 한 두 곡이 아니니까 그게 제일 가슴 아팠습니다. 제일 또 생각나는 것이 처음에는 방송만 금지 됐다가 음반 제작까지 전부 금지를 시켰습니다. 그럴 때 국내 분들은 제가 붜 공연 다니니까 그때는 뭐 극장 공연이 많이 성행할 때니까 국내 공연은 다 얼마쯤이라도 불러 드릴 수 있는데 외국에서 이 저기〈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이것을 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느냐고 그렇게 저한테 편지를 팬레터 같은 거 오고 그럴 때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런 가슴 아픈 일이 너무너무 많았고 〈동백 아가씨〉가 저의 이름을 낳게 해준 정말 탄생 이미자라는 이름을 탄생 시켜준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그 노래를 부를 수 없었을 때는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가 상상에 맡기고 싶어요. 그냥!” 금지곡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 이후 대부분 해제되었다.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로 평가받고 있는 노래에 ‘왜색’, ‘비탄조’라는 모호한 심의 기준을 적용했던 사례는 분명 불행했던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미자 선생님 말씀, “나중에 해금이 됐을 때 아, 그래도 나를 사랑해주는 분들이 이렇게 정말 몇 년 동안 음반 제작까지 못했을 때 웬만한 것 같았으면 벌써 사라졌겠죠. 그러나 끝까지 사랑해주시고 끝까지 그 노래 불러주시고 요청해 주시고 그 은혜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네모네〉– 이운석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선생님(1968년 지구레코드사)
1절. 아네모네는 피는데 아네모넨 지는데 / 아련히 떠 오르는 그 모습 잊을 길 없네
해가 져도 달이 떠도 가슴 깊이 새겨진 / 떠나간 그 사랑을 전할 길은 없는 가
2절. 이슬에 젖은 꽃송이 아네모넨 지는 가 / 별빛에 피어나서 쓸쓸히 시들 줄이야
마음 받쳐 그 사람을 사모하고 있지만 / 허무한 그 사람을 달랠 길은 없는 가
–〈그리움은 가슴마다〉–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이미자 선생님(1967년 지구레코드사)
1절. 애타도록 보고 파도 찾을 길 없네 / 오늘도 그려보는 그리운 얼굴 그리움만 쌓이는데 /
밤하늘에 잔별같은 수많은 사연/ 꽃은 피고지고 세월이 가도/ 그리움은 가슴마다 사무쳐 오네
2절. 꿈에서도 헤맸지만 만날 길 없네 / 바람부는 신작로에 흩어진 낙엽 서러움만 쌓이는데 /
밤이슬에 젖어드는 서글픈 가슴/ 꽃이 다시피는 새봄이 와도/ 그리움은 가슴마다 메아리치네
다음에는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즈음해 “대중가요 선거송”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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