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62. 〈고모령을 넘을 때〉〈비내리는 고모령〉(2022.05.09.)
내일은 대한민국 제20대 윤석열 대통령님 취임일입니다. 오직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1972년 5월 10일 부산 명지동 집 앞 강가에서 놀다 저녁무렵 집으로 들어가니 부모님께서 동생들 데리고 고향인 생곡 작은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내일 학교가야 되는데” 하니 어서 빨리 가라고 했습니다. 그날 필자가 태어난 작은집에서 자고 있는데 아버지와 엄마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대로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부산으로 가더니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를 탔고, 어머니가 노란 카스테라 빵과 사이다를 줘서 삼형제가 웃으며 맛있게 먹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 외삼촌댁 다락방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밤에 밖을 보니 불빛 찬란한 건물이 보이는데, 명보극장 간판이 보였습니다. 다음날 다섯식구가 간 곳은 망우동 당숙어른집, 일곱식구인 그집의 작은방 한칸에서 한달동안 지냈습니다.
집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었고, 가내 과자공장도 있었는데 과자 부스러기를 자주 얻어 먹었던 기억이 나고, 길 건너 금란교회에 설치된 그네에서 놀았던 기억도 납니다. 그리고 6월이 되자 도착한 곳이 망우리 고개를 넘어서 왕숙천 천막집. 당시 유원지인 왕숙천’ 주변은 한창 경춘국도 확장공사로 아스팔트가 깔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흘러 구리시(당시는 구리면)에 정착한 지 벌써 50년이 지났습니다.
–〈고모령을 넘을 때〉– 월견초 작사, 박시춘 작곡, 이미자 선생님(1969년 지구레코드사)
1절. 아무리 슬퍼도 가슴 아파도 울면서 고모령을 넘지말자 했건만 / 그 무슨 잘못으로 정처도 없이 여자만이 혼자서 목이 메인 채 / 비나리는 고모령을 넘어야 하나
2절. 비오는 고모령 바람도 찬데 / 피눈물 하염없이 앙가슴을 적시네 / 하늘은 어이해서 나에게 만이 이다지도 가혹한 벌을 주나요 / 고모령을 넘는 발길 지향도 없다
〈고모령을 넘을 때〉는 1969년 이미자 선생님께서 영화 ‘비나리는 고모령’의 주제가로 부르신 노래로 2월 15일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박시춘 작곡집, 고모령을 넘을 때/사랑하는 눈으로’ 앨범 타이틀곡입니다. 앨범엔 SIDE 1면. 이미자 선생님〈고모령을 넘을 때〉,〈사랑하는 눈으로〉,〈저달도 따라서〉,〈상처〉,〈잊을 수가 없어요〉 SIDE 2면. 박건〈고모령을 넘을 때〉.〈어느 이별〉.〈추억의 만년장〉.〈현해탄 연가〉, 파랑새 자매〈살구꽃 사연〉등 10곡이 실려있습니다.
영화 ‘비나리는 고모령’은 1969년 제작 아세아필림(이지룡), 기획 나영주, 각본 박남주, 감독 임권택, 배우 문희, 김희라, 박노식, 김희갑, 특별출연 독고성. 주제가는 이미자 선생님, 박건. 배우 김희라의 영화 데뷔작입니다. 타이틀 “사랑아 너를 위해 주먹을 버렸다만…!” “아버지 김승호의 뒤를 이어 세계 정상에 도전하는 야심의 사나이 김희라!” 영화 줄거리,「시동(김희라)는 불량배의 생활을 청산하고 캬바레의 가수인 지향(문희)와 혼인해 살아갑니다. 그 후 6.25전쟁이 발생하게 되자 그는 군대에 입대를 하고, 지향은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서울로 상경해 어린 딸을 데리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날 시동의 친구인 용팔(박노식)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으면서 남편 시동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전장에서 제대를 하여 돌아온 시동은 지향과 친구 용팔의 사이를 오해 해 그들의 곁을 떠납니다. 시간이 흘러 오해가 풀리자 시동과 지향은 다시 결합해 새출발을 다짐한다.」
☞ 1968년 12월 1일 김희라 아버지 김승호(1917년〜1968년, 철원 출생)가 작고하자 임권택 감독은 빈소에 들려 아들인 김희라에게 영화배우 데뷔를 권유합니다. 영화사업이 실패한 후라 집안형편이 매우 안 좋았는데, 김희라는 어느날 임권택 감독이 쌀한포대를 보냈왔다고 회상했습니다. 김승호는 국내·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9번 수상했고, 1961년엔 영화 ‘마부(馬夫)’로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던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였습니다. 주요작품은 1946년 데뷔작 ‘자유만세’와 1956년 ‘시집 가는 날’, 1960년 ‘로맨스 빠빠’ 1961년 ‘마부’ ‘박서방’ 1963년 ‘혈맥’ 등 250여 편을 남겼습니다.
김희라(1947년생)는 유아기 시절 구리에서 자랐다고 하니 필자는 더욱 정감이 갑니다.
이 영화는 필자가 어릴때 엄마에게 맞았던 2번 중 첫 번째 맞은 계기가 되었던 영화입니다. 1969년 어느 날 부산에 사시던 외삼촌께서 집에 오셨는데, 엄마 몰래 독립문이 선명하게 새겨진 백원짜리 지폐 한장을 손에 꼭쥐어 주셨습니다. 주인집의 큰아들인 박명곤 형님과 함께 10원에 12개 팔던 국화빵과 팥빙수를 사서먹고, 2 km정도 떨어진 명지 신호극장에서 영화 한편을 봤는데, 그 영화가 바로 ‘비 나리는 고모령’이었습니다. 필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면은 김희라가 앞에서 포탄이 터지자 울부짖는 장면과 마지막 부분에 기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문희가 바라보고 있던 장면 뿐이지만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가 “어디 갔다가 이렇게 늦게와?” “놀러” “돈 내놔” “무슨 돈이요.”(대답이 반말에서 존댓말로 바뀌었습니다. (^^) “아까 외삼촌이 주고간 돈말이야” “안 받았는데요.” “이 노무 손(孫)이, 이리와” 엄마 손에는 다듬이 방망이가 쌍방망이로 들렸습니다. 경상도 말로 매타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 그 시간 방안의 천정 모서리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다음날 아침 밥상에는 쌀밥과 고깃국이 올라왔습니다.
필자는 자가용을 운전할 때 항상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만 듣습니다. 차분한 음성으로 부르시는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를 들으면 저도 운전이 아주 차분해 지기 때문입니다. 작년 어느날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데 마침〈고모령을 넘을 때〉가 나와서 여쭤봤습니다. “엄마! 이 노래 알아요” “모르겠는데” “이 노래〈고모령을 넘을 때〉인데, 그때 이 영화 보고와서 엄마한테 쌍다듬이 방망이로 억수로 맞았는데, 어린애를 왜 그리 때렸어요?” 엄마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으셨겠죠. 85세 울엄마 만수무강하세요.
–〈비내리는 고모령〉– 호동아(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1948년 럭키레코드사)
1절.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오 /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 넘어오던 그 날 밤이 그리웁고나
2절. 맨드래미 피고 지고 몇몇해던가 /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 비 나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3절. 눈물 어린 인생 고개 몇고개이더냐 / 장명등이 깜박이던 주막집에서 / 손바닥에
서린 하소 적어 가면서 / 오늘밤도 불러 본다 망향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은 해방후 대한민국 1호 가수인 현인이 부른 전통가요 곡입니다. 작사 유호, 작곡 박시춘, 노래 현인 3박자 히트작 콤비의 또다른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1948년 봄에 유호의 필명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 제목〈비나리는 고모령〉이 발표 됐는데, 노래의 배경은 대구광역시 만촌동에 있는 고모고개, 즉 고모령(顧母嶺)입니다. 고모령(顧母嶺), 돌아볼 ‘고’ 어미 ‘모’ 고개 ‘령’ 직역하면 ‘어머니가 돌아보는 고개’라는 뜻입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모동에 있는 고모역으로 가기 위해서 고개 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그 고개가 고모령입니다.
고모령에는 두 개의 전설이 있습니다. 첫번째 전설은,「옛날 옛적에 고모령에 홀어머니와 어린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노승이 지나가면서 “이 집이 이렇게 가난한 것은 전생에 덕을 쌓지 않아 그렇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와 남매는 덕을 쌓기 위해 흙으로 산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 산봉우리가 모봉(母鳳), 형봉(兄峰), 제봉(弟峰) 세 개의 봉우리입니다. 그런데 덕을 쌓아야 할 남매는 서로 높이 쌓으려고 시샘을 하면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감에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정처 없이 길을 걷다가 고개 정상에서 자식 걱정에 집을 향해 뒤를 돌아본 것이 ‘어머니가 뒤를 돌아봤다.’고 해 고모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전설은,「징병을 가는 젊은이들을 태운 열차가 고모령을 넘어 갈때 한 번에 올라가지 못하고 아주 더디게 고개를 넘어가자 그 순간에 어머니들이 아들의 얼굴을 한번이라고 더 보기 위해서 고개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나〈비내리는 고모령〉이 만들어진 배경은 작사가 유호가 이곳 고모령이 징용이나 징병으로 멀리 떠나는 자식과 어머니가 이별하던 장소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별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만든 것으로 발표 당시에는 이 지역이 경상북도 경산군이었습니다. 가사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라는 슬픈 내용으로 시작해, 고모령에서 어머니와 헤어진 화자가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곡은 어머니의 존재를 녹여 당시 대중들의 가슴을 울린 민중적인 노래였습니다. 스스로를 “망향초 신세”라 자조하며 향수를 달래는 내용은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던 격동기의 시대 상황과 잘 어우러져 지금까지 국민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가요무대’가 2005년에 방송 20돌을 맞아 가장 많이 방송된 노래 순위를 발표했을 때,〈울고넘는 박달재〉〈찔레꽃〉에 이어 전체 3위를 차지 꾸준한 인기를 입증했습니다. 1991년 10월 17일 고모령 입구 망우당공원 자전거경기장 옆에 노래비가 세워졌는데, 앞면에는 노래의 가사가, 뒷면에는 이 노래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향한 영원한 사모곡(思母曲)으로 널리 애창되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아로 새겨져 있습니다. 〈비내리는 고모령〉노래비에 새겨진 문구는,「현인 노래, 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
옛날 왜정 시대에 경산에 있는 작은 마을 어떤 아주머니가 살고 있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살았는데, 독립운동을 하던 두 아들은 왜놈에게 잡혀서 모두 대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남편없이 기른 두 아들이 모두 감옥에 가 있는 것이 어머니로서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는지라 시간만 나면 감옥으로 면회를 가곤 하였는데, 그날도 대구 감옥에 있는 아들을 면회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다. 고모령 고갯길에 이르렀는데 그날따라 비는 내리고,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서러움으로 고모령을 넘어오던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경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고개를 넘어야 하고, 그 고개를 넘으면 대구가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고개는 고개를 돌려서 본다는 顧(고)와 어머니 母(모)를 붙여서 顧母嶺(고모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라 적혀있습니다.
경부선 고모역(顧母驛)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모동에 위치한 경부선의 철도역입니다.
1925년에 영업을 시작해서 1970년대까지는 많이 이용을 하던 기차역이었으나 2004년 7월 15일에 여객 취급이 중단되었고, 2006년 11월 1일 열차는 정차하지 않고 화물차만 머무르는 간이역으로 바뀌었습니다. 2020년 8월 1일에는 80여년 간 대구 시민과 경북 도민들의 만남과 이별의 장소였던 고모역을 철도역사와 전통 대중문화를 전시한 휴식공간인 ‘고모플랫폼 208’이 개관돼 사람들의 발길을 잡고 있습니다.
고모역 부근은 한 맺힌 전설 때문인지 열차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노래비를 취재하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젊은 기자의 ‘불망비’가 서 있어 더욱 찾는 이들의 가슴을 저미게합니다. 「사진기자 김문호(1963. 3. 10.〜1991. 9. 27.)는 경상북도 안동 태생이다. 고향에서 인동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세종대학교를 졸업했다. 언론의 길에 뜻을 세우고 공채시험을 통해 한국일보 기자가 되었다. 늘 밝고 부지런 했으며 남다른 끈질김과 정의감으로 시대의 현장을 뛰고 달렸다. 가을비 내리던 이곳 경부선 철길은 그가 달려간 마지막 현장이다. 고모령 노래비 취재에 열중하다 뒤에서 달려온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순직하니 아깝고 또 아깝다. 29세 젊음을 뜨겁게 마감한 김문호 기자여! 그대의 영원한 기자혼을 이 돌위에 새긴다. 1992. 9. 27. 김문호 기자 1주기에. 한국일보 사우 일동, 한국사진기자회.」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모령을 한번 찾아보고 싶기도 합니다.
–〈잘있거라 고모령〉–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현인(1955년 빅토리레코드사)
1절. 울면서 소매잡고 말리는 님을 / 가만히 뿌리치고 떠나는 마음 / 고모령 고개위에
달빛 차거운 / 이 밤이 서러워서 올해도 운다
2절. 나그네 뜬정이란 원망을 마오 / 둘이서 처다보던 저 달이 운다 / 진달래 다시피는
시절이 오면 / 진정코 고모령을 다시 찾으마
3절. 말없이 쳐다보는 눈시울 속에 / 실없는 그 언약을 주고 받으며 / 기적을 남겨놓고
떠난 고모령 / 또 다시 만날 날이 아득하구나
〈잘있거라 고모령〉은 1955년 부산 구포 출신 국민가수 현인이 부른 곡으로 빅토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잘있거라 고모령 / 꽃파는 백설희’ 앨범에 실려있는 노래입니다.
☞ ‘빅토리레코드사’는 1954년 설립된 부산 미도파음반공사 자회사로 작곡가 백영호(1920년〜2003년)가 실질적으로 운영해 첫 음반은 ‘방운아〈마음은 자유천지〉/백설희〈비의 부르스〉’였습니다. 대표곡은, 한종명〈하와이 코리안송〉,금사향〈남국의 처녀〉,현인〈잘있거라 고모령〉,백설희〈꽃파는 백설희〉,박재홍〈나루터 고향길〉,남인수〈추억의 소야곡〉,한정무〈비오는 스텐드바〉,박애경〈낭자일기〉,방운아〈서울을 가야지〉,정향〈원통해서 못 살겠네〉,신해성〈여인우정〉,황금심〈님이 좋아요〉,도미〈추억〉등이 있습니다.
–〈고모령 아가씨〉– 천지엽 작사, 김광 작곡, 권미숙(1965년 신세기레코드사)
1절. 고모령 고개마루 기약만 남겨 놓고 / 한양 간 도련님이 어이해 안오시나 /
기나긴 세월 속에 독수공방 홀로 새며 / 오늘이나 오시려나 내일이나 오시려나 /
눈물 속에 기다리네
2절. 한많은 고갯마루 구슬픈 피리 소리 / 외로운 내 마음을 어이해 울려주나 /
한번 간 도련님은 소식조차 오지 않고 / 가는 봄에 오는 봄에 이팔청춘 흘러가네 /
언제 다시 만나리오
〈고모령 아가씨〉는 1965년 가수 권미숙이 부른 노래로 신세기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영화주제가 선과 악’ 앨범에 실려 있는 곡입니다. 음반 SIDDE A면. 최무룡 〈골목길의 장미〉,〈선과 악〉,김세레나 〈구두닦기 소녀〉,권미숙 〈고모령 아가씨〉,윤설아 〈가버린 날의 오후〉,동송일 〈만나보고 싶네〉,SIDE B면. 타미 〈청춘을 변상하라〉,아리랑씨스터즈 〈연애 전쟁〉,오기택 〈사랑과 죽엄이 남긴 것〉,김부자 〈이대로 저 세상에〉,박정길〈항구는 말이 없네〉,권미숙 〈너무 조르지 마세요〉 등 12곡이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음에는 부부의 날을 맞아 부인이 작사하고, 남편이 작곡한 노래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햔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