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대조영에 의해 동만주에서 건국되었고, 그 강역은 만주뿐인 것으로 국사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전신인 고구리의 강역도 만주일대 뿐이었고, 통일신라와의 경계는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사학계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주는 유물적 증거가 바로 길림성 돈화와 화룡에서 발견된 정혜·정효공주의 무덤이라고 한다.
두 공주의 무덤이 있는 곳은 대진국의 동쪽 강역임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대진국이 공주의 무덤을 다른 나라 땅에 조성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진국의 서쪽 강역은 서만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중국대륙 깊숙이 하남성 황하까지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 “과연 그럴까?”라고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동모산과 천문령은 어디인가?
동모산(東牟山)은 대진국(발해)의 초기도읍지이고, 천문령(天門嶺)은 대조영이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대파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런 동모산을 길림성 돈화에 있는 성산자산성으로 알고 있으며, 천문령은 서만주 심양 부근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과연 그런지 대진국의 강역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우선 동모산을 <중국고대지명대사전>으로 검색하면 “하남성 탕음현 서쪽 40리로 탕하가 나오는 곳. 즉 수경주의 석상산이다.(在河南汤阴县西四十里,汤河出此,即水经注所谓石尚山也。)
”이라고 하는데, 황하북부 하남성의 동북단 은허(殷墟)발굴지 남쪽에 있는 학벽(鶴壁)시를 말하는 것이다.(http://greatcorea.kr/sub_read.html?uid=136§ion=sc2§ion2= 참조)
천문령을 검색하면 “천문산은 하남성 휘현 서북 50리”라는 설명이 나와 산서성과 하남성 휘현의 경계에 있는 해발 1,304m짜리 지금의 운태산(云台山)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곳을 아래 에 언급된 대중상과 대조영의 건국 행적에 연관시키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상세는 http://greatcorea.kr/sub_read.html?uid=137§ion=sc2§ion2= 참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668년 고구리 멸망 때 서압록하(西鴨錄河)를 지키던 대중상이 동쪽 동모산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는 후고구리(後高句麗)라 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했고 32년 붕어하니 묘호를 세조(世祖)라 하고 시호를 진국열황제(振國烈皇帝)라 하였다. 영주(營州) 계성에 있던 태자 대조영이 제위에 올라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하고는 국호를 대진(大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고구리의 옛 땅을 차지하니 땅은 6천리가 개척되었다. 21년 붕어하니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聖武高皇帝)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대의 압록수는 현재 산서성을 가로지르는 분하를 말하는 것이며, 영주는 유주(幽州)에서 떨어져나간 행정구역이므로 황하북부 하남성과 산서성 남부 어딘가를 지칭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동모산과 천문령도 압록수와 유주 가까운 동쪽 어딘가에 있어야 합당할 것이다. 현재의 학설대로 동만주에 있던 대조영이 이해고의 당나라 군대와 서만주 심양 일대에서 싸웠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로 역사왜곡인 것이다.
해동성국 대진국의 강역은 9천리
이후 대진국의 황제들은 나라의 강역을 더욱 넓힌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태자 무예가 즉위하여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니 개마, 구다, 흑수의 여러 나라가 신하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 대장 장문휴를 보내 등주와 동래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자 당나라 왕 융기(현종)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듬해 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遼西)의 대산(帶山) 남쪽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당나라가 비밀리에 신라와 약속하여 급습하자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했다. 인안 17년 송막(松漠) 12성을 쌓고 요서(遼西) 6성을 쌓으니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원폭이 9,000리로 성대한 나라였다.
이 해 당나라와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사람 셋이면 한 마리의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이 때 백성들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방은 안락했다. 대진육덕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19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광종’이라 하고 시호를 ‘무황제(武皇帝)’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태자 흠무가 즉위하여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용원부로부터 상경용천부로 옮겼다. 이듬해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를 가르치며 환단고사를 강연하고 국사 125권을 편찬하니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을 홍익하는 교화는 이로써 만방에 미치게 되었다. 57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세종’ 시호를 ‘광성문황제(光聖文皇帝)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동만주에서 발견된 정혜·정효공주 비문에 대흥(大興)이라는 연호가 기록되어있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 대진국의 강역은 9,000리였다고 한다. 길림성 돈화와 화룡에서 발견된 정혜·정효공주의 무덤이 있는 곳은 대진국의 동쪽 강역임이 확실하다. 대진국의 서쪽 강역은 위 동모산과 천문산만 보더라도 중국대륙 깊숙이 하남성까지였다는 사실이다.
<대진국본기>에 기록된 대진국 황제들의 자체연호 사용기록은 <신당서>의 기록과 일치했다. 따라서 대진국은 당나라의 제후가 아닌 자주적인 국가였으며, 당시 대진국보다 훨씬 작았던 당나라가 9천리 강역의 대진국에게 조공을 바쳤다는 위 <태백일사>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일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최근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어불성설의 동북공정을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하겠다.
* 본 컬럼은 본지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