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천리 해동성국 대진국의 주 무대는 하남성”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태자 무예가 즉위하여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니 개마, 구다, 흑수의 여러 나라가 신하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 대장 장문휴를 보내 등주와 동래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자 당나라 왕 융기(현종)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듬해 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遼西)의 대산(帶山) 남쪽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당나라가 비밀리에 신라와 약속하여 급습하자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했다. 인안 17년 송막(松漠) 12성을 쌓고 요서(遼西) 6성을 쌓으니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원폭이 9,000리로 성대한 나라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다는 등주(登州)와 동래(東萊)를 중국에서는 현재 산동성 동부의 래주(萊州)라고 말하고 있으나, 원래 동래는 강태공의 고향이며 무덤이 있는 하남성 위휘현 동쪽에 있던 지명이다. 강태공이 제(齊) 땅의 제후가 되어 봉지인 영구(營丘=위휘현)에 도착할 무렵 래이(萊夷)의 군사들이 공격을 하는데 래(萊)란 영구 땅 주변에 사는 만족(灣族)들이라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660년 당나라는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임명한다. 보통 군대을 동원해 지휘관들에게 직책을 내릴 때에는 정벌할 지역의 이름을 따는 것이 상례이다. 아래에서 보듯이 우이(=해우)는 바로 래이이고, 백제를 상징하는 우이는 치우천왕의 무덤이 있는 산동성 서단에 있는 유성시 양곡현이었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 원문> 嵎夷 : 《书尧典》“宅嵎夷,其说有六”,(甲)《孔传》东表之地称嵎夷,(乙)《释文》马融曰,嵎、海嵎也,夷、莱夷也,(丙)《后汉书东夷传》夷有九种,曰畎夷、干夷、方夷、黄夷、白夷、赤夷、玄夷、风夷、阳夷,昔尧合羲仲,宅嵎夷,曰旸谷,巢山潜海,厥区九族,”是以九夷为嵎夷也,(丁)《说文》嵎山在辽西,一曰嵎铁,旸谷也,(戊)《薛士龙书古文训》“嵎夷,海隅诸夷,今登州,于钦齐乘因以宁海州为嵎夷,今登州,”于钦齐乘因以宁海州为嵎夷,宁海,今山东牟平县,(己)《东坡书传》当在东方海上。
(번역) 우이 : <서요전> 우이가 사는 곳에는 여섯 가지 설이 있다.
(갑) <공정> 공표의 땅을 우이라 칭한다.
(을) <석문> 마융이 말하길 우는 해우이고, 이는 래이(莱夷)이다.
(병) <후한서 동이전> 이족은 아홉 종족이 있는데, 구이를 우이라 했다.
(정) <설문> 우산은 요서(遼西)에 있다. 일설에 우철이라 하며 양곡(산동성 서단)이다.
(무) <설사룡서고문훈> 우이는 해(海) 부근에 사는 모든 이족을 말하며 지금의 등주이다. 영해주를 우이라 했다. 현재 산동성 모평현이다. (기) <동파서전> 우이는 동방의 해상에 있다.
(주: 海는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내륙호수인 대야택 즉 발해를 말하는 것이며, 산동성 등주는 지명이동된 것이다.)
위 기록의 요서군을 밝히는 결정적 근거가 바로 백이‧숙제의 무덤이다. 허신의 <설문해자>에 “수양산은 요서에 있다(首陽山在遼西)”는 기록이 있고, 백이·숙제가 굻어죽은 수양산의 위치를 확실하게 밝힌 기록은 <사기 집해>로 “마융이 말하길 수양산은 하동지방의 포판에 있는 화산의 북쪽에 있고, 그곳은 황하가 꺾여 흐르는 곳이다(集解馬融曰 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라는 기록으로, 현 산서성 서남부 영제시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위 기록을 입증해주는 지도는 청나라 때 만들어진 <대청광여도>로 지도에는 황하가 꺾이는 동쪽에 수양산과 포판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며 백이‧숙제의 묘라고 상세히 그려져 있다. 여기서의 하동(河東)은 글자 그대로 황하의 동쪽의 동쪽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 남부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河东 : 战国时,梁有河东地,《孟子梁惠王一》“河内区,则移其民于河东,移其粟于河内,河东区亦然,”秦汉时置郡,黄河流经山西西境,成南北线,故山西境内,在黄河以东者,统称河东。”이라는 설명을 봐도 알 수 있다.
인안 17년에 12성을 쌓은 송막(松漠)은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松漠 : 即千里松林,亦曰平城松林,今河北省围场县扩内蒙古克什克腾地方,兴安岭多松,滋生遍及原麓,故名。唐初置松漠都督府,以处契丹”라는 설명에서 보듯이 원래 평성(平城)이다. 평성은 북위의 도읍으로 중국에서는 현 산서성 북부 대동(大同)시라고 말하고 있으나, 실은 하남성 낙양 북쪽에 있는 맹진(孟津)이다. (맹진의 위치는 위 지도 참조)
그 근거로는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따르면 “평음현 : 한나라 때 평음현이 설치되었으며, 응소가 말하기를 ‘평성의 남쪽에 있다. 옛날에 평음이라 했다’ 진나라 때 폐했다.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 동쪽이다. 삼국 위나라 때 하음으로 바뀌었다. (平阴县: 秋时平阴邑,《左传昭公二十三年》“二师围郊,晋师在平阴,王师在泽邑。”汉置平阴县,应劭曰:“在平城南,故曰平阴。”晋废,故城今河南孟津县东,三国魏改曰河阴。)”라는 설명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평성은 한고조 유방의 일화로 유명한 곳이다. 한고조 유방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한신을 북방에 배치하고 토벌을 명했다. 그러나 한신은 어렵다 판단하여 흉노와 화평을 시도했다. 이후 한고조가 이를 책망하자 아예 흉노로 투항해버렸다. 묵돌은 한신의 인도를 받아 한나라를 공격해 들어갔고, 유방도 이를 막으려 출동했으나 묵돌의 유인책에 걸려 평성의 백등산에서 7일간이나 포위당하게 된다. 이때 유방의 부인 여치(여태후) 는 남편과 한나라를 구하기 위해 묵돌 선우에게 치마끈을 풀고서야 퇴로가 열려 장안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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