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이 역사에 대해 문외한이면서도 “한국은 중국의 일부다.”라고 망언을 한 중국의 수장 시진핑은 시간을 내서 본 스카이데일리에 들어와 매일 역사컬럼을 읽는 등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올바른 역사가 아닌 왜곡된 역사로 15억 인민들을 다스리고 주변국들과 외교하려다가는 언젠간 사달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시진핑이 공부해야 할 올바른 역사는 다음과 같다.
◈ (진시황) 서이(西夷)족 문왕이 세운 주나라 이후 중국은 사분오열(四分五裂)로 갈라져 제후들끼리 서로 다투었던 춘추(春秋)와 전국(戰國)시대가 전개된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고는 처음으로 황제를 칭했다는 진시황(秦始皇)의 혈통도 동이족이었다. 진시황 정(政)의 친부(親父)는 여불위(呂不韋)였는데, 여(呂)씨는 아래 강태공의 경우에서 보듯이 동이족의 성씨이다.
흔히 별명인 강태공 또는 태공망(太公望)으로 알려져 있는 그의 성은 강(姜)이고,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이라 강상이라고도 불리며, 그의 조상이 ‘여(呂)’ 땅의 제후로 봉해져 여씨 성을 가지게 되었기에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린다. 여씨 성은 위 두 사람 외에 나라를 위해 흉노 묵돌선우에게 몸을 바친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치(呂雉), <삼국지>에서 최고 괴력의 장수 여포(呂布), 관우를 생포한 오나라 장수 여몽(呂夢)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동이족인 강태공의 자손으로부터 갈라져나갔다는 중국의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고(高), 노(盧), 여(呂), 허(許), 구(丘,邱), 강(強), 방(方), 정(丁), 장(章), 사(謝), 제(齊), 하(賀), 향(向), 가(柯), 뢰(賴), 초(焦), 기(紀), 최(崔), 좌(左), 역(易)씨 등 수많은 성씨가 강태공의 후손으로 현재 상당수의 인민들의 국적은 중국인이나 핏줄로는 동이족인 것이다.
서안 동쪽에 있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이 진시황의 무덤인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그곳에서 볼 수 있듯이 출토된 병마용의 병사들 대부분이 동이족의 상징인 상투를 틀고 있으며 또 우리 민족 고유의 갑옷인 찰갑비늘갑옷을 입고 있다. 따라서 당시 중국의 역사 역시 결국은 동이족의 역사였던 것이다.
◈ (만리장성) 진시황이 흉노의 남진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장성을 현재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감숙성 임조(臨兆)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북성 동단 산해관(山海關)까지 장장 만 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엄청난 과장이고 실은 산서성 남단 중조산(中條山=옛 갈석산)과 황하북부 하남성을 지나는 길이 약 천리 가량의 작은 장성에 불과하다.
참고로 만리장성의 동단(東端)으로 알려져 있는 산해관 장성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의 현판, 화살구, 봉화대의 방향으로 볼 때 동쪽 사람이 서쪽에서 오는 적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장성임을 알 수 있다. 바닷가에서 시작되는 산해관 장성은 평지를 지나다가 각산(角山)에서부터 산속을 지나 북경까지 이어진다.
◈ (유방의 한나라) 만약 유방(劉邦)에게 북부여 해모수(解慕漱) 단군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과연 한(漢)이라는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을까? 유방은 당시 여러 곳에서 항우에게 밀리고 있었다. 낙양 근처에 있는 요충지 영양(滎陽)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결국 항우에게 영양이 넘어가게 되어 힘의 균형은 거의 항우에게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유방은 그토록 어려운 전황 하에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역전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초군(楚軍)의 향수병을 건드려 전투의욕을 상실케 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아니라, 북부여 해모수단군이 날래고 용맹한 기병들을 연(燕)나라 사람들과 함께 보내 유방을 도움으로써 항우와의 기나긴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반고(班固)의 <한서>고제기(漢書高帝紀)에 “북맥(北貉)과 연(燕)나라 사람이 와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으로 한(漢)을 도왔다.(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북맥은 바로 고구리의 전신인 북부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후 유방은 장안에 입성해 한(漢)왕조의 기틀을 세워 한나라는 이후 200년을 넘게 이어간다. 이때부터 중국인들을 한족(漢族)이라고 따로 불렀으며, 한나라는 한족으로 대변되는 중국의 아이콘이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 북부여 해모수단군이 한왕(漢王) 유방을 돕지 않고 초왕(楚王) 항우를 택했더라면 아마 중국의 역사는 한족이 아닌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 (한사군) 유방이 북부여의 도움으로 항우를 물리치고 세운 한나라의 전성기는 바로 무제(武帝의가 통시시기였다. 중국은 이때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식민지였던 한사군(漢四郡)을 한반도 북부에 400년간 설치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을 엄청나게 과대포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무제가 보낸 한나라 군대는 번조선의 우거왕에게 연전연패하여 거의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또한 우거의 신하들은 한나라 군대의 공격을 잘 막아내 이겼으면서도 오히려 겁을 냈으며, 이 전쟁이 제발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나라가 마지막으로 총공격을 해오자, 우거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해버린다. 이로써 이 전쟁은 끝이 났으나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은 전쟁이었다.
무제는 항복한 5명의 번조선 대신들에게 땅을 나눠 제후로 봉했고, 도성으로 돌아간 육군사령관 순체(荀彘)와 수군사령관 양복(楊僕)에게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목을 베어 저작거리에 전시하는 기시(棄市)라는 극형에 처한다. 이런 전쟁 상황 속에서 그 부산물인 한사군이라는 식민지가 어떻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한나라 식민지인 한사군이 아니라 번조선의 자치령이었으며, 곧 이 번조선 땅은 졸본(卒本)에서 일어난 의병 고두막한(高豆莫汗)에게 접수되고 만다.
역사적 사실이 이렇거늘 현재 식민지 한사군이 4백년간 한반도에 있었다는 이론은 <한서>를 쓴 반고의 붓장난 때문이다. 전쟁을 직접 종군했던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는 “이로써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으로 했다. 삼을 봉해 홰청후, 한음은 적저후, 왕겹은 평주후, 우거의 아들 장은 기후로 삼았다. 최는 아비(로인)가 죽었으나 큰 공이 있으므로 온양후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80년 후에 나온 반고의 <한서>에 “마침내 조선을 멸해 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했다” 즉 조선을 평정(定)했다는 것이 조선을 멸망(滅)시킨 것으로 바뀌며, 위 자치령 조선오군(홰청·적저·평주·기·온양)이 조선5군의 제후들의 이름까지 삭제해가며 식민지 한사군(낙랑·현토·임둔·진번)으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사군은 한족 사가(漢族史家)들의 붓장난과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 (왕망) 중국의 상징인 한(漢)나라를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 역시 동이족이었다. 왕망은 원래 김(金)씨였으나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을 수치로 여긴 한족들에 의해 왕씨로 둔갑하게 된다. 왕망의 증조부는 바로 흉노 휴도(休屠道)왕의 왕자였다가 곽거병에게 붙잡혀 장안으로 끌려왔던 김씨의 시조 김일제이다. <한서 권68 곽광·김일제전> “김당(김일제의 증손)의 모친 남씨는 곧 왕망의 어머니로 임금과 같은 배에서 생산된 동생이라는 공이 들어난다. 김당이 남대행을 태부인으로 올렸다.(当母南即莽母功显君同产弟也。当上南大行为太夫人。)”라는 기록이 이를 증명해준다.
제3부에 이어집니다.
(다음 컬럼 자료>
후한을 멸망시킨 고구리
왕망이 전한(前漢)의 국권을 찬탈한지 15년 만에 유수(劉秀)가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다시 한나라가 세워지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후한(後漢)이라고 부른다. 후한(25~220)은 우리 고구려초기 때 195년간 존재했던 인구 천만 명 내외의 작은 나라였다. 후한의 끝에 있던 위·오·촉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에 기록된 인구수는 조조의 위나라가 66만호, 손권의 동오가 52만호, 유비의 촉한이 28만호로 합계 146만호(戶)에 불과했다.
이러했던 후한이 망한 것도 바로 우리 고구리(고구려) 때문이었다. 중국은 중국역사의 아이콘인 한나라가 내부적 요인(황건적의 난)에 의해 위·오·촉 삼국으로 분열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한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이유는 고구리와의 수차례 전투에서 그야말로 몰살을 당하는 참패를 했기 때문이다.
한나라 10만 대군이 고구리로 쳐들어오자 명림답부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펼치며 수비에 전념하다가, 한날 병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대열이 흐트러지며 후퇴하기 시작할 때 명림답부가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해 좌원(坐原)의 들판으로 몰아넣으니 한나라 군사들이 맞서 싸울 힘도 없이 몰살당해 단 한 필의 말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한나라는 좌원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하여 국력이 급속도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장정 10만이 전멸 당함으로써 생산력의 극심한 저하를 불러왔고 과부·고아가 양산되면서 사회적 불만이 극도로 고조되었기에 민란인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이후 중국의 상징 한나라는 12년 후 고구리에게 다시 한 번 좌원에서 카운터펀치를 맞고는 멸망의 깊은 늪 속으로 빠지게 된다.
고국천왕 6년(184)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리를 치니 고국천왕이 왕자 계수를 파견해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천왕이 직접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한나라 군사와 좌원에서 싸워 승리했는데 베어버린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한다. 12년 전 10만 대군을 전멸시킨 명립답부의 좌원대첩의 여파로 멸망의 늪으로 들어서게 된 한나라는 이 좌동친전이 치명타가 되어 급격히 무너지고 만다.
이 전쟁 이후 한나라는 정국의 불안과 가뭄 등 기상이변으로 민심이 이반되어 전국적으로 대규모 농민봉기인 황건기의(黄巾起義)가 발생하여 결국은 조조(위)·손권(오)·유비(촉)의 삼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삼국사기>에 “고국천왕 19년(197) 중국에서 큰 난리(=황건기의)가 일어나 피난해 귀순하는 한나라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