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로 편입된 선비족은 단군의 후예
한국에서의 사드배치로 인해 냉랭해졌던 한·중 관계가 사드에 부정적인 문재인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개선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되자 10일 외국 정상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한·중 관계 개선의 축전을 보냈으며, 이튿날 전화까지 걸어 취임 축하를 한 뒤 가장 시급하게 해결하고 싶은 현안인 사드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고 보도되었다.
또한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는 망언을 한 시진핑 주석은 이번에는 11일 중국 공산당기관지인 인민일보에 “한국과 중·한 관계를 계속 고도로 중시하고 있으며, 중국은 한국 측과 한·중 관계의 성과를 함께 유지하길 원한다.”는 축전을 1면 상단에 게재했다. “한국은 중국의 중요한 이웃나라”라는 이 축전의 내용은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다.
<이번에는 “한국은 중국의 중요한 이웃나라.”라는 입장을 밝힌 시진핑 중국 주석>
한국은 중국의 중요한 이웃나라인가?
역사에는 어느 나라든 항상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있으며 영욕(榮辱)이 교차하는 법이다. 900년간 동북아와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아이콘인 고구리(高句麗)도 마찬가지였다. 찬란한 문화와 광활한 영토를 자랑했던 대제국이었지만 치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과 식민사학자들이 그 치욕을 크게 부각시켜 고구리 역사의 본질을 흐리려 하고 있다는데 있다.
많은 사람들은 고구리 동천태왕 때 위(魏)나라의 일개 변방장수인 관구검(毌丘儉)에게 고구리의 수도 환도성(丸都城)이 도륙당한 것을 아마도 고구리 제1의 수치로 여길 것이다. 고구리는 정말로 위장 관구검에게 도성이 유린당하는 씻을 수 없는 패배를 당했을까? 그리고 그가 세웠다는 각석기공비의 위치는 과연 지금의 압록강변 집안현일까? 하는 의문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220년에 후한 헌왕의 왕위를 찬탈해 위(魏)라고 칭하자, 이듬해 유비가 촉(蜀)을 세우고 229년 손권이 오(吳)를 세워 황제임을 자칭했다. 드디어 중국 역사의 아이콘인 한나라가 사라지고 위·오·촉 삼국의 할거(割據) 시대로 들어간다. 당시 고구리는 동양대제(동천태왕)이 다스리고 있었고, 고구리와 위나라의 중간지역인 요동(遼東)에는 공손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요동은 원래 고구리 땅이었지만 황위승계에 실패한 역적 발기가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넘긴 뒤로는 공손씨가 소유하게 되어 고구리와는 완전 적대관계가 되었고 위나라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당시 중간에 있던 공손씨를 견제하기 위해 맺은 려위동맹(麗魏同盟)에 의해 238년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치자 동천태왕이 군사를 보내 협조하니 드디어 요동에서 3대에 걸쳐 50여 년간 독자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공손씨가 망하고 만다.
약조대로라면 위나라는 당연히 요동을 고구리에게 돌려주어야 하는데, 사마의가 이를 거부하자 대노한 동천태왕이 친히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242년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해 빼앗아버린다. 이에 사마의는 관구검으로 하여금 고구리를 침공케 한다. 동천태왕은 위장 관구검의 1차 침공을 비류수(沸流水)에서 대파했고 2년 후 다시 침공한 관구검을 양구(梁口)에서 대파했으나, 자만에 빠져 방심하다가 졸지에 많은 군사를 한꺼번에 잃어버려 도성(환도성)을 버리고 작전상 후퇴를 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246년 10월에 위장 관구검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는 고구리 백성들을 도륙내고 현토태수 왕기로 하여금 동천태왕을 계속 추격하게 했다. 도성 함락 소식을 들은 동천태왕은 눈물로 한탄하며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다가 붙잡힐 뻔했으나 유유와 밀우의 분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는 전열을 가다듬어 대반격을 하여 결국은 위나라 군사들을 물러나게 했다.
<역사왜곡을 위해 조작된 관구검기공비와 위군 공격로. 이 전쟁은 산서성 남부에서 일어났다>
이 때 관구검이 각석기공비를 환도성에 새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기공비의 일부 조각이 1906년 집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나 그것 역시 허구였음이 입증되었다. 계속 패하다가 동천태왕이 방심으로 잠시 도성을 빼앗았던 관구검의 행위는 너무도 과대포장되어 마치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사군을 설치했다는 가짜 역사이론과 그 허구의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위·오·촉 삼국으로 분열되었던 중국은 사마의(중달)의 손자인 사마염이 위나라 왕 조환을 겁박해 끌어내리고는 선위 형식으로 265년 왕위에 올라 국호를 진(晉)으로 바꿨다. 280년에는 동오를 정벌해 삼국정립의 시대를 끝내고 중국의 통일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나면서 서로 북방민족의 기마용병들을 끌어들임으로써 316년에 서진이 망하고 동진과 5호16국시대로 갈기갈기 찢기게 된다.
중국사로 편입된 선비족은 단군의 후예
호(胡)는 한족이 아닌 비한족을 낮춰 부르는 말이고, 5호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氐), 흉노의 일파인 갈(羯), 강(羌) 등 다섯 종족 이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이 중 중국사에 가장 영향을 미친 민족은 선비족으로 북위(北魏)를 세운 탁발(拓跋)씨, 연(燕)을 세운 모용(慕容)씨, 북주(北周)를 세운 우문(宇文)씨, 흘복(乞伏)씨, 독발(禿髪)씨 단(段)씨 등 6개 부족이 강했다.
<요사지리지>에 “요나라는 그 선조가 거란이고 본시 선비의 땅인 요택에서 살았다.(遼國其先曰契丹 本鮮卑之地居遼澤中)”라는 기록과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東京遼陽府 本朝鮮之地)”라는 기록이 있으며, <요사>의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조선처럼 팔조범금(八條犯禁)의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조선의 후예들은 고구리와 선비·오환(鮮卑烏桓)으로 나뉘고, 선비·오환은 다시 모용(慕容)·탁발(拓拔)·우문(宇文)·단부(段) 등으로 분류된다. 본래 흉노에 예속된 유목민족으로 몽골족과 튀르크족의 조상이기도 한 선비족은 동호(東胡)족의 북쪽 일파로 흉노가 한나라와 전쟁을 치르다가 약해진 틈을 타 독립해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남하하게 된다. 참고로 동호족의 남쪽 일파는 오환(烏丸)족이다.
<좌측은 수양제 양광 우측은 당고조 이연, 둘 다 중국의 통일국가를 다스렸던 선비족이었다>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문제 양견(楊堅)은 우문씨가 세운 북주(北周)의 외척으로 선비족일 가능성이 아주 높으며, 북주(北周)의 귀족 출신으로 당나라를 세운 고조 이연(李淵) 역시 선비족일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외에 모용선비 출신으로 서쪽 청해성으로 옮겨간 토욕혼(吐谷渾)도 선비계이다.
여하튼 선비족은 북위의 한족화 정책으로 한족에 서서히 동화된다. 요서 지역에 살던 선비족은 당나라 때 거란족으로 명칭이 바뀌고 훗날 대진국의 요왕 야율아보기가 쿠데타를 일으켜 요(遼)나라를 세운다. 말갈족과 선비족과 타타르족의 혼합인 여진족이 거란족을 정벌하고는 반란을 못하도록 거란인 주위에 여진인을 배치하는 바람에 거란족과 여진족의 민족통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상기 컬럼은 본지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