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의 일인독주체제와 연개소문의 정변
시진핑 주석은 “지난 5년간 우리 당 지도부는 오랜 세월 해결 못한 많은 문제를 해결했고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많은 것을 이뤄냈다. 중국은 우리 발로 일어서서 부유해지고 강력해지는 역사적인 도약을 했다”고 자화자찬하면서 자신을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같은 국가지도자 반열에 올리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 마오쩌둥은 지금의 중국을 태동시킨 아버지이고,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정책으로 중국 경제를 도약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난 5년간 자신이 중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국 국가주석의 임기는 5년에 2연임으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시 주석은 2022년 이후에는 국가주석 직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현재 중국의 정치시스템은 국가주석의 1차 임기인 5년이 되는 해에 전당대회를 열어 차기 지도자 2명을 선정해, 5년 후 그 중 한 명이 국가주석이 되고 다른 한 명이 총리가 되는 제도이다.
강력한 경쟁자로 당시 중경시 당 서기였던 보시라이(薄熙來)를 부패혐의로 제거하고 2013년에 집권에 성공했던 시 주석은 이번 19차 전당대회를 앞두고는 역시 차기 지도자로 부상되고 있던 쑨정차이(孫政才) 중경시 당 서기를 보시라이와 같은 부패혐의로 전격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 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진핑 일인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한 다음, 2022년에 있을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임기 10년을 더 연장해 장기집권으로 가는 체제를 만들려는 것이다. 시 주석이 법으로 정한 최대 10년 임기 대신에 그야말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시황제’로 거듭날 수 있을까?
아무리 시진핑이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국가주석을 종신제로 하기는 어려우며, 또한 아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세습제는 더더욱 불가능하므로 이는 현대판 황제나 다름없는 북한의 김정은 독재정권과는 구분된다. 여하튼 현재 견제마가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일인체제를 구축해서 독주하는 걸 보면 마치 고구리 말기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보는 것 같다.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
당나라의 요청으로 고구리에 잡혀 있던 수많은 수나라 병사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도교를 받아들이고 노자를 국민들에게 강의하게 했으며, 산천지도까지 그려다가 바치고, 당나라 사람들이 와서 수나라 병사들의 해골을 묻고 위령제를 지내면서 전승기념물인 경관(京觀)까지 헐어버렸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던 영양왕의 굴욕적인 친당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연개소문은 마침내 정변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고는 정권을 잡는다.
<삼국사기>에서는 “25년(642) 임금이 동부대인 연개소문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였다.”라고 간단히 기술했으며, 이어 “11월에 당 태종이 왕의 부음을 듣고 애도의식을 거행했고, 많은 부의물품과 함께 조문사절을 보내 제사에 참여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의 사유와 과정이 없어 뭔가 허전하고 이상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강단사학계에서 위서라고 하는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 영류왕이 시해당한 이유와 과정이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영류왕이 수십만 명을 동원해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까지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연개소문이 이를 중지시키고자 하니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병사를 빼앗고 오히려 장성 축성을 감독하는 일을 맡긴다. 그러면서 은밀히 다른 대인들과 상의해 연개소문을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정보를 재빨리 입수한 연개소문은 “어찌 몸이 죽고 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이 급하니 때를 잃지 말지어다.”라며 모든 부장들을 모아놓고 각자 임무를 지시했다. 연개소문이 임지로 떠나는 날 술상을 성대하게 차려놓고 대인들 모두를 초청해 같이 열병식 사열하자고 제의했다. 모두들 오자 연개소문은 큰 소리로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 구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고 한다. 빨리 이들을 제거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정변 소식을 듣고는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松壤)으로 가서 조서를 내려 대신들을 모으려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신하가 없어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숨이 떨어져 붕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연개소문은 고장(高藏)을 맞아들여 황제로 세우니 이가 바로 고구리의 마지막 임금으로 연호를 개화(開化)라고 한 비운의 보장제(寶藏帝)이며, 연개소문은 대막리지가 되어 실질적으로 모든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연개소문의 정변 소식은 11월 5일 영주도독 장검이 올린 장계를 통해 당 태종에게 보고된다.
<자치통감>에 영류왕의 죽음 이외의 모든 상황이 위 <태백일사>와 거의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부대인 연개소문의 열병식에 초청되어 죽은 대신들이 약 100여 명이고, 영류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어 말을 달려 궁궐로 들어가 손수 왕을 시해한 후 시신을 토막 내어 시궁창에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치통감> 기록이 실제로 있었던 사실 그대로인지 아니면 연개소문을 악마의 화신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과장된 표현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당시 당나라에서 보는 연개소문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라 그런지 안하무인에다가 흉폭하고 잔인무도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연개소문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먼저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개소문(蓋蘇文) 혹은 개금(蓋金)이라고 하는데, 성이 천(泉)씨로 자칭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호방했다. 그의 부친 동부[혹은 서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미워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고 나쁘게 폄하되어 있다.
또한 “몸에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니니 주위에서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항상 땅에 엎드린 사람을 디딤판으로 해서 말에 오르내렸다. 나가서 다닐 때에는 반드시 대오를 지어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길게 외치면 사람들이 모두 급히 흩어져 달아나는데 구덩이나 골짜기를 가리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몹시 고통스럽게 여겼다.”고 혹평되어 있다. 과연 연개소문의 원래 성은 천(泉)씨였으며 그토록 잔인하고 흉폭한 인물이었을까?
다음 연재에서 연개소문의 진면목에 대해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