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결례는 ‘한국은 중국의 일부’의 결과물
대통령 특사로 중국을 방문했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만나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면담은 당초 예정된 20분을 훌쩍 넘는 40분간이나 길게 이어졌으며, 특사단원이 시 주석에게 스마트폰으로 기념사진을 찍자고 제안하자 흔쾌히 응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 대통령의 특사를 접견하면서 얼마 전 홍콩의 캐리람 행정장관 당선인의 예방을 받던 때처럼 자신이 테이블의 상석인 중앙에 앉고 한국 대통령의 특사는 우측 옆 테이블 끝에 앉는 좌석배치였는데 이는 마치 국가주석이 주재하는 중국내부의 업무회의에 한국 대통령이 실무자로 참석한 것처럼 보여 심각한 외교결례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 특사는 “시 주석은 문 대통령을 진지한 대화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으며 양국 관계를 빨리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고, 시 주석은 한국과 함께 어렵게 이루어온 성과를 지키고 싶다고 하면서 “서로의 갈등을 잘 처리해 양국관계가 하루빨리 정상궤도로 되돌려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 특사는 양국 갈등의 핵심인 사드에 대해 “대화를 통해 사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사드 실무처리는 한국에서 국방장관 임명이 끝나야 가능할 것이라고 하자, 시 주석은 “역사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또한 이 특사는 시 주석이 북핵을 단계적이고 포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우리 정부의 인식에 공감을 표했다고 하면서 “남북 대화가 재개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번에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 대통령의 특사를 접견하는 자리를 상하관계로 배치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고의로서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미중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이다.”라고 말한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시 주석의 “(사드 문제는) 역사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시진핑의 뇌리에는 한국(조선왕조)이 중국(명나라)의 속국이라는 역사인식으로 꽉 차있고, “고구려(한국)는 당나라(중국)의 지방정부.”라는 가짜역사를 동북공정을 통해 진짜역사로 정립했다는 확신에 차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러한 시진핑 내부에 있는 잘못된 역사인식은 막상 북한에서 핵실험이나 정변이 발생 시 바로 실제행동으로 나타날 우려가 크다고 하겠다.
명나라 사신에게 큰절한 조선국왕들
태종 이방원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 그는 고려를 지키려는 충신 정몽주 일파를 죽이고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개국을 주도한 인물이다.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당시 실권자 정도전과 이복동생 방번과 방석을 제거한 후 나중에 왕위에 올라 절대 왕권을 휘두른 인물이다.
사병을 혁파하는 등 군사제도를 정비하고, ‘의정부서사제’ 대신 ‘육조직계제’를 운영해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게 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또한 왕권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던 이거이와 이숙번 등 창업공신과 자신의 처남 4명과 세종의 장인 등 외척들까지 과감하게 제거한 태종 이방원은 말 그대로 무시무시한 군주 그 자체였다.
그런데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인 태종 이방원도 고양이 앞에 쥐처럼 꼼짝 못하는 상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명나라였다. 태종이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장면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데, 명나라의 제후였던 태종은 과연 어떠한 의식절차로 종주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했을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태종 8년(1408 무자) 4월 16일 (제목) 흠차 내사 황엄 등이 명의 칙서를 가지고 오다.
“조정의 내사 황엄·전가화·해수·한첩목아와 상보사 상보 기원 등이 오니, 산붕을 만들고 나례와 백희를 베풀고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모화루에서 영접했다. 사신이 경복궁에 이르러 선포한 칙서에 이르기를, ‘조선국왕 이휘에게 칙하노라. 취해 보낸 말 3천 필은 이미 계속해 도착했다. 지금 왕에게 화은 40개, 매개의 중량이 25냥 합계 1천 냥과 저사 50필, 소선라 50필, 숙견 1백 필을 내려 준다.’하였다. 임금이 칙서에 절하고 나서, 서쪽 층계로 올라가 사신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았다. 황엄이 성지를 선유하기를 ‘네가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잘 생긴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을 간택해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임금이 머리를 바닥에 두드리며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고 했다.
이러한 태종의 행동은 당시 조선왕조가 취한 외교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러한 명나라에 대한 중화모화사대주의는 조선왕조 500년을 그대로 이어져 1644년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음에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없어진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쓰며 죽을 때 ‘유명조선(有明朝鮮)’이라는 문구를 묘비에 적어 자신의 명나라에 대한 사대모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즉 조선은 뼈 속까지 친명(親明)이었던 것이다.
명나라 대신/장군들에게 큰절 올린 선조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몽진했다가 평양에 진군한 일본군이 북상할 경우 명나라에 망명을 하려했던 선조 임금은 명나라 사신이나 장군만 만나면 넙죽넙죽 큰절을 올리곤 했다. 물론 당시 예법 상 사신이 황제를 대신하는 공식행사인 경우에는 당연이겠지만, 선조 임금은 명나라 사신/장군만 만나면 큰절을 올리곤 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대표적인 기록을 인용하겠다.
◈ 선조 26년(1593) 8월 14일 을미 (제목) 제독을 접견하여 남쪽의 적세, 방어책을 논하다
“이 제독과 양 부총이 황주에 이르니, 상이 제독에게 두 번 절하자 제독도 답배했다. 상이 또 양원에게 재배하니 양원이 답배했다. 상이 ‘우리나라가 대인의 은덕을 입어 오늘이 있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의 군신이 그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고 있으니 감사의 절을 올리겠소이다.’라고 말하니, 제독이 ‘사배(謝拜)는 그만두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은 ‘황은이 하늘과 같으니 대인께 사배하겠소이다. 만약 대인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에 어찌 오늘이 있겠소이까.’라고 말하고, 상이 승지를 시켜 제독에게 ‘국왕께서 배례(拜禮)한 뒤에 삼고두(三叩頭)하고자 합니다.’라고 고하게 하니, 제독이 ‘이것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상이 제독 앞으로 나아가 재배하고 삼고두하니 제독이 답배했다. 상이 다시 양원 앞으로 나아가서 재배하니 양원이 답배하였다.”
◈ 선조 26년(1593) 11월 9일 (제목)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예를 거행하다
“상이 4번 큰절하는 예를 거행하고 또 전(殿)으로 올라가 꿇어앉으니, 도사가 나아가 선유첩을 펴 놓았다. (중략) 상이 허리를 구부리고 엎드려 머리를 두드리고 전(殿)에서 내려와 4번 큰절을 올렸다. 이어 도사에게 전 위로 함께 올라가기를 청하여 상이 두 번 절하고 읍(揖)했다. 도사가 답배하기를 청하니, 상이 ‘감히 감당할 수 없소이다.’라고 말했으나, 도사가 한사코 요구했으므로 드디어 답배하게 했다.”
아마 시진핑은 이러한 사실들만 알고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 특사의 좌석배치를 했으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는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는 망언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유구한 역사에서 명나라 속국이었던 조선왕조의 5백년 역사 이외에는 대부분 중국을 압도하고 지배했던 역사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만 아는 시진핑은 조선왕조 이외의 역사도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 상기 컬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