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격)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 맞다.
– 발해는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내륙호수
동북공정의 가장 핵심 이론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참으로 허황된 주장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동북공정이 전혀 근거 없는 이론만은 아니라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들 나름대로는 확실한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 역사의 내막에 대해 잘 모르는 제3국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유주(幽州)라는 행정구역에는 요동군, 요서군, 상곡군, 어양군, 낙랑군, 현토군, 우북평군, 탁군, 대군 그리고 발해군(渤海郡) 등 10개 군이 속해 있다. 따라서 발해는 중국의 행정구역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구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대조영의 나라가 발해로 불리게 된 것은 713년 당 현종이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 동북공정의 주장이다.
이러한 사료적 근거가 있다 보니 중국의 주장에 대해 우리 정부가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한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제대로 반박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강단사학계의 이론이 동북공정과 거의 일맥상통하는 일제식민사학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있으나마나한 동북아역사재단은 하루라도 빨리 해체시키는 것이 매년 200억 원이 넘는 국가예산을 절약하는 길일 것이다.
현재 대조영의 발해에 대한 건국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다. 신라는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대동강과 원산 이남을 차지한다. 고구려 출신 유격대장 대조영이 천문령에서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격파하고 동만주에 있는 동모산으로 가서 699년 나라를 세우고는 국호를 발해라 했다. 근처에 발해라 불린 경박호에서 국호를 가져왔다.”
<중국 백과사전>에서는 대조영의 나라 발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조영은 스스로 성을 대씨라 했고, 측천무후가 그 아비를 진국공으로 봉했으며, 대외적 호칭은 대진국이라 했다. 스스로 진국왕이라 했는데 이로써 발해국의 전신이 새로이 열린 것이다. 발해국은 당나라 때 속말말갈이 주체가 되어 건립되어 동북지구의 지방민족을 통치한 정권이다. 698년 속말말갈의 수령 대조영이 말갈국을 세워 스스로 진국왕이라 불렀다.
<구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713년 당 현종이 대조영에게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으로 봉하고 그곳을 통합해 홀한주라 하여 ‘홀한주도독’을 추가로 제수했다. 그로부터 말갈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발해라 불려 전해졌으며, 진국이란 국호도 발해국으로 바뀐다. 이러한 유래로 당나라 통치구역 내의 지방민족 자치정권이 된다. 762년 당나라 조정이 발해를 나라로 인정해 최초 도읍은 구국(길림성 돈화)이다. 742년 중경현덕부(길림성 화룡)로 천도했고, 755년 상경용천부(흑룡강성 용안)로 옮겼고, 785년 다시 동경용원부(길림성 훈춘)로 옮겼고, 794년 상경용천부로 도로 천도했다. 926년 요나라에게 멸망해 15세를 전하고 역년은 229년이다.”
이상과 같은 발해에 관한 중국자료는 현재 우리 국사교과서에 수록된 내용과 같다. 그러니 어찌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의 역사왜곡인 동북공정에 맞대응할 수 있겠는가! 중국은 대한민국의 예산으로 동북공정을 확실하게 굳혀가고 있는 중이다. 참으로 기막히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이러한 동북공정을 타파할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원래 발해는 어디일까?
중국에서는 발해를 중국의 산동성과 하북성과 요녕성과 접하고 있는 현 중국의 내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식민사학계는 대조영이 동만주 돈화에서 나라를 세우면서 국호를 근처에 있는 발해에서 가져왔는데, 그 발해는 지금의 경박호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보다 오히려 식민사학계의 역사왜곡의 도가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래 발해는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는 대야택(大野澤)을 말하는 것이며, 그 황하북부 일대를 발해군(渤海郡)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발해라는 지명은 1928년 역사왜곡을 위해 지명이동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당나라 현종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한 이유는 대조영이 당시 발해군에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인데, 그 발해군은 바로 황하부근 하남성 학벽시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대진국은 고구리를 계승한 황제국
668년에 고구려가 망하자 장수 대조영이 유격대 활동을 오랫동안 하다가 고구려 멸망 약 30년 만에 발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동북공정과 식민사학계의 공통된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고구리와 대진국(발해)의 연관성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있는 이론으로 보인다. 올바른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668년 고구리가 망하자마자 대중상이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워 후고구리(後高句麗)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으로 하여 32년간 재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뒤를 이어 즉위한 태자 대조영이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대파한 후 체제를 정비하고는 국호를 대진(大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했다고 한다. 이후 대진국은 계속 황제 칭호와 자체연호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제 대조영의 등극 모습. 국호를 대진으로, 연호를 천통으로 바꿨다>
당나라는 이러한 우리의 대진(大震)을 자기네 마음대로 발해(渤海)라는 국호로 불렀다. 물론 713년 당나라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책봉조서가 왔더라도 대진국 황제 대조영은 코웃음 치며 그 조서를 찢어버렸을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불과 15년 전에 당나라 10만 대군이 천문령에서 싸워 장수 이해고가 겨우 몸만 빠져나갔을 정도로 그야말로 참패를 당했고, 국호를 대진으로 연호를 천통으로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당나라의 일개 제후가 되라는 책봉조서를 받아들였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진국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高句麗라는 국호를 썼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우리가 대조영의 나라를 발해로 부르는 한 동북공정 타파는 요원하며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역사적 사실대로 국호를 대진국으로 바꾸는 것만이 중국의 역사왜곡인 동북공정을 극복하고 찬란했던 우리 역사를 복원하는 길이 될 것이다.
고구려 역사지킴이 성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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