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 헌덕왕 8년(816)에 “봄 정월 시중 헌창을 지방으로 내보내 청주(菁州)도독으로 삼았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절동(浙東)까지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이 170명이나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816년은 장보고가 당나라로 들어가기 4년 전이고, 청주도독이란 ‘청주’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관을 말하는데 위치는 미상이다.
<수경주>에 “절동은 절강(浙江)의 동쪽을 말한다.”고 설명되어 있으며, 절강은 길이 410Km의 절강성 최대의 강으로 항주(杭州)시를 거쳐 항주만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다. 게다가 한반도에는 절강 또는 절동이란 지명이 눈을 씻고 봐도 없기에, 절동은 대륙 동부 절강성에 있던 지명임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당서> 헌종 11년(816)에 “두 번에 걸친 대홍수로 도성 및 여러 지역이 물에 잠기고 4,700호가 떠내려가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을 구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 헌종 11년은 816년으로 신라 헌덕왕 8년이다. 이 해에 서토 당나라와 동토 신라에 똑같이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신라인 170명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서토로 가지 않고 절강의 동쪽으로 간 것이다.
반도사관에 중독된 강단사학계는 경상도에 흉년이 들자 신라인들이 배를 타고 절강성 동쪽으로 갔고, 이 때 장보고와 정년이 당나라로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아주 그럴 듯하나 절강성과 한반도 사이에 흐르는 해류는 황해로 올라가는 주 해류와 양쪽으로 내려오는 연안 해류가 뒤엉키는 곳이라 옛날식 돛단배로는 황해 횡단이 절대로 불가능하다.
전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일식들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최적관측지가 고구려는 바이칼호수 동쪽, 백제는 북경 일대, 상대신라는 양자강 하류, 하대신라는 한반도 남부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신라의 24개 일식 중 2개는 한반도에서 전혀 볼 수 없다는 결과도 나왔는데, 이는 경주에서 일식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말인 것이다.
<삼국사기>에 신라에서 서리·우박은 초가을인 7월(음력)에 처음 내리기 시작해 늦게는 여름 4월(음력)까지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는 1년 중 약 10개월간 서리·우박이 내릴 수 있는 지형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경상도 경주는 그 기간이 6개월을 넘지 못하는 따뜻한 곳이다.
<삼국사기>에 신라에서 55회의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중 10회 정도는 ‘땅이 갈라지고’ ‘붕괴되고’ ‘함몰되고’ ‘땅속물이 끓어오르고’ 등의 용어로 미루어보아 진도 7.0 이상의 강진으로 보인다. 특히 도성에 23회의 기록이 집중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신라도성이 격렬한 지진대 위에 있다는 말인데 현재 경상도 경주의 지진상태는 어떠한가?
신라의 왕자로 알려져 있는 김교각(喬覺) 스님이 절강성 항주 영은사(靈隱寺)에 지장보살로,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에 등신불 지장보살로 모셔져있는 이유는 당시 신라가 그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이렇듯 신라는 한반도 경상도가 아닌 엄연히 대륙의 동쪽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국이 조성한 산동성 장보고 유적지
신라는 당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당시 무역에 종사했던 신라인들이 회하와 양자강 하류에 많이 모여 살게 되었는데 그곳을 신라방(坊)이라 했고, 이들을 관리하는 신라소(所)라는 행정기관이 설치되었고, 신라원(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法華院)이 유명하다.
당나라 무령군 소장이던 장보고가 824년에 세웠다는 적산법화원 유적지를 중국이 산동성 영성시 석도(石島)진에 조성한 이유는 그곳이 당시 당나라 땅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그곳은 무령군이 있던 서주(徐州)에서 너무 멀어 법화원일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게다가 산동성은 당시 백제가 활동하던 강역이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많은 한국인들이 석도가 청해진이라는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오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재야사학자는 “청주(靑州)는 산동성이고 해주(海州)는 강소성이었기 때문에, 청해진은 어떤 한 지역의 명칭이 아니라 이 두 곳을 지키는 진이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억지춘향식 해석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주장의 배경에는 <대청광여도>에 그곳에 정해(靖海)와 적산(赤山)과 해신묘(海神廟)라는 지명이 적혀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또 다른 청해진 후보지인 절강성 영파시 서쪽 주산(舟山)에는 진해(鎭海)와 정해(定海)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그런데 석도는 수군기지(청해진)가 되기에는 입지조건이 별로 좋지 못하다.
예로부터 수군기지는 수심이 깊으면서 조수 간만의 차이가 별로 없어야하며, 강풍과 해일을 피하기 위해 육지로 둘러싸인 내해가 있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수군기지로서의 입지조건을 갖춘 항구는 항공모함을 도심 옆 바닷가에 접안시킬 수 있는 동양의 진주 홍콩이다.
석도 인근에 있는 청도(靑島)는 그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현재 중국의 해군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석도는 내해도 없고 외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항구인지라 그런 곳이 과연 청해진일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썰물이 되면 큰 배가 다닐 수 없는 엉터리 청해진인 완도의 장도보다는 입지조건이 훨씬 좋아 보인다.
강단사학계는 <삼국사기 장보고열전>에 있는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장도를 청해진으로 비정했는데, 이 문구는 조선왕조 때 반도사관을 위해 고의로 편집된 것으로 추정한다. 완도는 조선왕조의 주요한 수군기지로 기록된 적이 없다. 임진왜란 때도 없으며, 현재 대한민국의 해군기지는 진해에 있다. 그 이유는 완도의 입지조건이 대규모 수군기지에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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