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102주년(1919년) 삼일절 이었다.
대한독립을 위하여 희생하신 순국선열들을 기리기 위하여 시민 사회 단체는 물론 국가 및 지자체들도 그 뜻을 기리는 기념 행사를 했다.
기록에는 삼일 만세(1919년) 이전에도 국민들은 대한 독립을 위한 마음은 가슴에 담고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지금의 구리시(九里市)는 양주군 구지면(龜志面)이었으나 1914년에 일본 놈들의 통치 수단 차원에서 구지면(龜旨面, 九旨面 출처: 조선시대 지리서인『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조선 중기 발간 )을 구리면(九里面)으로 지명을 변경했고 변경 시기는 1914년이었다. 이토록 일본 놈들이 지명(地名)을 가지고 장난한 배경은 따로 있었다.
즉, 일본 놈들은 대한제국을 침입하고 군대를 강제 해산 시켰다.
그러자 전국 각 지방에서는 의병들이 모여 창의군(倡義軍)을 창설하기로 했고, 급기야 전국 13도에서 모인 의병들은 1906. 12. 06. 양주군 수택리에서 모여 창의군(倡義軍)을 창설했다.
그 후 창의군(倡義軍)은 창설을 마치고,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 일본 놈들을 내쫓자면 1차 척후병(개척자) 300명 선출하여 탐색 부대를 파견했으나 이 정보가 누설 되어 망우산 고개에서 선발대 창의군(倡義軍) 의병들은 참변을 당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자신만 혼자 살기 위한 밀정(密偵)은 있었다.
또한 당시 창의군(倡義軍) 대장은 「허위」 장군 (許蔿 경북 구미 출신 1855~1908)이었고, 호는 「왕산」(旺山) 이었다.
이를 기리기 위하여 정부는 「동대문〜 청량리」구간 「도로명」을 「왕산로」 지정했다.
이토록 일본 놈들은 통치 수단으로 구리시 수택동에서 창설한 창의군(倡義軍) 창설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아예, 구지면(龜旨面, 九旨面) 지명을 구리면(九里)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구리시는 뚜렷한 태극기 뜻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냥 「태극기 도시 구리시」라고만 주장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태극기의 뜻을 살리려면 전국 13도에서 의병들이 나라를 찾기 위하여 모여 구리시 수택동에서 창의군(倡義軍)을 창설하고 일본 놈들을 내쫒자며 서울로 진격한 동네이기 때문에 이를 살려 홍보하면 여타 국민들은 태극기의 도시는 더욱 이해할 나아가 지금의 중랑교는 예전에 구지면(龜志面) 이었기에 서울 중랑교에서 왕숙천교까지 망우로가 아닌 창의군로(路) 하면 「태극기의 도시」 면모는 뜻과 명분이 있을 것이다.
하여튼 우리가 살고 있는 구리시는 1919년 삼일운동보다 더 빠른 시기인 1906년 나라를 찾기 위한 의병 조직인 창의군(倡義軍)을 창설한 지역이고, 동네 지명까지 강제로 바꾸는 수난을 겪은 곳이기 때문에 그 뜻은 보존하여야 하며, 구리시가 왜? 태극기 도시인지는 모든 국민에게 반드시 알려야 할 것이다.
삼일절을 맞이해서 뜨거운 마음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다.
2021. 03. 02.
필자 : 박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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