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214.〈비 내리는 호남선〉〈떠나는 여인〉(2025.05.05.)
오늘은 불기 2568년 ‘부처님 오신 날’과 ‘어린이 날’이고 1894년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에서 탄생하신 독립운동가시며 제1대, 2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신 해공 신익희 선생님께서 1956년 작고하신 날입니다. 내일은 ‘얼굴 없는 가수’ 손인호 선생님 탄신일이고, 8일은 ‘어버이 날’입니다.
오늘은 해공선생을 기리는 곡이라 회자된〈비내리는 호남선〉과〈울어라 기타줄아〉필자의 아버님 애창곡〈사랑아 다시 한번〉을 부른 남미랑님의 데뷔곡〈월남가신 나의 님〉과〈언제 다시 만나리〉〈떠나는 여인〉5곡을 올리겠습니다.
–〈비 내리는 호남선〉– 손로원 작사, 박춘석 작곡, 손인호(1956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2절.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 내리는 호남선에 /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비 내리는 호남선〉1956년 손인호가 오아시스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노래로 이 곡에서 영감을 얻어 1987년 발표된 노래가 김수희〈남행열차〉(김진룡/김진룡)라 합니다.
주현미TV에서 발췌「손인호 선생님의 ‘비 내리는 호남선’은 우연한 계기로 히트하게 된 곡입니다. 사실 1956년 이 노래를 녹음하는 도중에 반주가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대로 발표할 만큼 기대를 안했던 곡이라고 합니다. 발표 직후에는 예상대로 큰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 5월에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항해 출마한 유력한 야당 후보 해공 신익희 선생이 유세를 위해 호남선열차를 타고 가던 중 쓰러져 급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유당에 대항해 온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야당후보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정권교체는 허무하게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우연히도 그 사건과 ‘비 내리는 호남선’의 가사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노래는 순식간에 대히트를 기록하게 됩니다. 신익희 선생이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대중들이 이 노래를 애잔하게 따라부르면서 결국 작곡가 박춘석 선생님, 작사가 손로원 선생님, 노래를 부른 손인호 선생님까지 줄줄이 불려가 취조를 당하게 됩니다.」세 분은 노래가 3개월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풀려났다 합니다.
신익희 선생은 1956년 5월 5일 선거 유세를 위해 호남선 열차를 타고 익산 함열역을 지나던 중에 작고해 서울 수유리 순국선열 묘역에 영면하고 계십니다. 1946년 9월 1일 국민대학교를 설립해 초대학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울어라 기타줄아〉– 무적인 작사, 이재호 작곡, 손인호(1956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낯설은 타향 땅에 그날 밤 그 처녀가 / 웬일인지 나를 나를 못 잊게 하네 /
기타줄에 실은 사랑 뜨네기 사랑 / 울어라 추억의 나의 기타여
2절. 밤마다 꿈길마다 그림자 애처로이 / 떠오르네 아롱아롱 그 모습 그리워 /
기타줄에 싫은 신세 유랑 몇천리 / 울면서 퉁기는 나의 기타여
3절. 꿈길도 그 추억도 애달픈 그 사랑도 / 모두가 조각조각 날러간 꽃잎 /
기타줄에 하소싣고 떠도는 내 심사를 / 너만은 알아다오 나의 기타여
〈울어라 기타줄아〉1956년 손인호가 부른 노래로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단장의 미아리고개(이해연) / 울어라 기타줄아’ 음반에 실려 있는 곡입니다. 작사가 ‘무적인’은 ‘조선의 슈베르트’라고 불린 작곡가 이재호(1919년∼1960년 본명 이삼동의 필명입니다.〈울어라 기타줄아〉는 한국전쟁 후 먹고 살기위해 전국을 떠돌아 다니던 애닲은 국민들의 서러운 삶의 애환을 기타연주로 달래본다는 애절한 마음을 담은 노래로 구성지게 부르는 손인호〈울어라 기타줄아〉(울어라 기타줄)는 인생 여정의 고달팠던 추억들을 느끼게합니다.
이 곡은 1962년 고봉산〈용두산 엘레지〉를 탄생하게 했습니다. 처음에 고봉산에게 주기로 약속된〈울어라 기타줄아〉는 녹음할 즈음에 손인호가 불렀습니다.「고봉산은〈울어라 기타줄아〉를 취입하기로 되어있어 죽도록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다니고 있던 중인 어느날 라디오를 통해서 손인호가 부르는 것을 듣고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날부터 고봉산은 직접 노래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피아노에 매달려 죽도록 작곡 공부를 했고, 아세아레코드사 최치수 사장에게 가사를 의뢰했으며, 곡이 만들어진 어느날 용두산 194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가 용두산공원에서 비장하게 노래를 연습해 발표한 곡이〈용두산 엘레지〉였던 것입니다.」
이어서〈사랑아 다시 한번〉의 가수인 남미랑(1945년 본명 김기옥, 서울 무교동 출생) 선생님〈월남가신 나의 님〉〈언제 다시 만나리〉〈떠나는 여인〉3곡을 올리겠습니다.
–〈월남 가신 나의 님〉– 반야월 작사, 김성근 작곡, 남미랑(1965년 콜롬비아레코드사)
1절. 당신은 군함타고 월남가신 나의 님 / 태극기 물결 속에 환송하던 부산항 /
어린 것 품에 안고 손 흔드는 나에게 / 안녕히 하시면서 웃으시던 그 얼굴 /
아아 아아 씩씩한 모습이 / 눈에 삼삼 어립니다
2절. 당신은 자유우방 도우시는 나의 님 / 비둘기 부대원에 무운장구 빕니다 /
군인의 아내된 몸 이 한맘을 지니고 / 용감히 싸우시다 돌아오는 그 날은 /
아아 아아 반가이 맞으리 / 부디 성공 하옵소서
〈월남 가신 나의 님〉1965년 남미랑 선생이 부른 데뷔곡으로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내 이름은 사나이 / 월남 가신 나의 님’ 앨범에 실려 있는 곡입니다. 음반에는SIDE 1면. 남미랑〈밤 거리의 엄마〉〈월남가신 나의 님〉〈기러기 우는 밤〉안다성〈빨간불 켜진 이층집〉〈애상의 키타〉〈심야에 만납시다〉SIDE 2면. 안다성〈그리운 모정〉〈내 이름은 사나이〉〈M항의 밤비〉남미랑〈그대따라 가오리〉〈서산아가씨〉〈한강수야 말해다오〉등 12곡이 수록돼 있습니다.
최초의 월남(베트남)파병은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견하면서 시작이 됐습니다. 그리고 1965년 2월 비둘기부대 2,000여 명에 10월 전투부대인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가 파병되었는데, 가사의 내용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월남 가신 나의 님〉은 비둘기부대 장병들의 무운장구를 비는 곡입니다. 모든 가족들이 하루하루 힘드셨겠죠. 10년 전인 2015년 10월 9일에 아이컨벤션위딩홀에서 개최된 ‘구리시목민봉사회’(회장 윤재근, 윤서병원 행정원장) 주최·주관 ‘구리시 보훈·향군단체 국가유공자 위안잔치’에 남미랑 선생과〈소양강 처녀〉김태희 선생을 초청 가수로 모셨는데, 월남 참전용사를 포함한 위안잔치라 말씀드렸더니, 1백만원을 들여〈월남 가신 나의 님〉MR을 복원하여오셔서 직접 노래를 불러주시니 그분들께서 너무 좋아했습니다. 열정이 참 대단하시죠?
–〈언제 다시 만나리〉– 김상만 작사, 장욱조 작곡, 남미랑(1971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언제 다시 만나리 소식 없는 그 사람을 / 언제 다시 만나리 보고 싶은 그 사람을
/ 당신만이 좋아서 당신에게 바친 순정 / 옛날 처럼 다정하게 다시 한번만 사랑을
해 주세요 네 / 다시 한번만
2절. 언제 다시 만나리 잊지 못할 그 사람을 / 언제 다시 만나리 사랑했던 그 사람을 /
당신만이 좋아서 당신에게 바친 순정 / 옛날처럼 변함 없이 다시 한번만
사랑을 해 주세요 네 / 다시 한번만
〈언제 다시 만나리〉1971년 남미랑 선생이 부른 노래로 3월 13일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추억의 대둔산 / 너와 나의 휴일’ 앨범에 실려 있는 곡입니다. 음반에는 Side A면. 나훈아〈추억의 대둔산〉〈폭풍을 몰고온 세 사나이〉김태희〈순정에레지〉 배성〈능금꽃〉조미미〈당신을 따르겠어요〉Side B면. 이수미〈너와 나의 휴일〉〈임 간 곳은 어디에〉최동길〈과거를 묻어다오〉남미랑〈언제 다시 만나리〉이남수〈철없는 심사〉등 10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남미랑 선생이 우수에 찬듯한 고운 음색으로 부르는〈언제 다시 만나리〉는 친동생 같이 꼭꼭 함께 다니며 살갑게 지내던 이수미가 2021년 9월 2일 하늘의 별이 되자 매우 안타까워 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제는 정말 두 분께서 언제 다시 만날 지는 알 수 없지만 만날 때까지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떠나는 여인〉– 정주희 작사, 정주희 작곡, 남미랑(1971년 오아시스레코드사)
1절. 이별도 서러운데 꽃은 왜 피나 / 이별도 서러운데 새는 왜 우나 /
비를 맞으며 걷는 발길 내 마음도 구슬퍼 / 정을 주고 정을 받고 사랑했는데 /
돌아서는 내 마음은 너무 쓰라려 / 추억 속에 흐느끼며 떠나는 여인
2절. 이별도 서러운데 새는 왜 우나 / 이별도 서러운데 바람은 부나 /
비를 맞으며 걷는 발길 내 마음도 외로워 / 가는 정도 오는 정도 서로 아쉬워 /
헤어지는 발길따라 비는 왜 오나 / 아쉬움에 흐느끼며 떠나는 여인
〈떠나는 여인〉1971년 남미랑이 부른 노래로 6월 20일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정주희 작곡집, 떠나는 여인 / 미련도 후회도 없다’ 앨범에 실려 있는 타이틀곡입니다. 음반에는 Side A면. 남미랑〈떠나는 여인〉〈잊어야지〉〈사랑아 다시한번〉여운〈상처〉배성〈예전처럼 다정하게〉Side B면. 나훈아〈미련도 후회도 없다〉〈꿈이여 다시한번〉이신화〈돌아가기 싫어요〉문평일〈붉은 입술〉김하정〈금산 아가씨〉가 수록됐습니다.
2015년 4월 6일 남미랑 선생님의 초청으로 ‘엘레지여왕 이미자 팬클럽’ 회원 100명이 KBS 가요무대 녹화장에서 처음 본 작곡가 정주희님은 훤칠한 키에 과묵한 미남형으로 ‘가요계의 신사’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2014년 4월 6일 TV조선 ‘대찬인생-남미랑’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고백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1971년 ‘사랑아 다시 한번’으로 큰 사랑을 받은 남미랑은 1960년~1970년대 제2의 이미자로 불리며 왕성히 활동했다. 남미랑은 1973년 27세 나이에 지방 방송국 PD와 혼인했지만 불행이 시작됐다. 지방에 살던 남편과는 6년 정도 결혼 생활을 했지만 실제 같이 산 시간은 6개월 정도였다고.」
☞ 필자 선정 남미랑 ‘베스트 50곡’ 1965년〈월남가신 나의 님〉〈과거를 가진 여자〉〈기러기 우는 밤〉〈낙동강 부루스〉〈낙화암 아가씨〉〈남산의 화가〉(with 김용만·김영국·황인자)〈뒷골목 청춘〉〈비오는 대전정거장〉〈비오는 인천항〉〈서산아가씨〉〈섬진강〉〈섬진강에 우는 여인〉〈시집가는 산색시〉〈여자의 길〉〈연분홍빛 내 가슴에〉〈울릉도 소식〉〈이별많은 목포항〉〈제물포 사랑〉〈제주도령〉〈추풍령 처녀〉〈하동 아가씨〉〈한강수야 말해다오〉1966년〈노총각이 장가간데요〉〈님 떠난 목포항구〉〈다도해 처녀〉〈동백꽃 포구〉〈방랑의 공주〉〈왈순이와 또순이〉〈선창가의 처녀〉〈선창 아가씨〉1967년〈눈물의 강화포구〉〈눈물의 낙도〉〈동학사의 밤〉〈밤비에 젖은 여심〉〈아프지 않는 상처〉〈한남동아가씨〉1968년〈가람가 물처녀〉〈갑사댕기〉〈서귀포 사연〉〈여인의 나루〉1969년〈밀양 아가씨〉〈비련〉〈진도 아가씨〉1970년〈사랑아 다시 한번〉1971년〈떠나는 여인〉〈무정한 님아〉〈조각배〉1975년〈하얀 돛단배〉2013년〈나는 못가네〉2021년〈아바이 잘가오〉입니다.(^^)
다음에는 정훈희 누님 생신을 맞아〈강 건너 등불〉〈꽃길〉〈진실〉등 5곡을 올립니다.
기사작성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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